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자녀를 키우는 대부분 부모의 관심사는 어떻게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인가에 있다. 젖 먹이 아기가 울면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려서 젖을 물리든, 기저귀를 갈아주든, 안아서 흔들어주든 그 필요를 채워준다. 아빠들에게는 똑같이 들리는 울음소리를 분간해 내는 신기한 능력이 엄마들에게 있는 것 같다.

아이가 자라고 자신의 의사 표현이 가능해지면, 요구하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 때로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여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자녀의 요구를 채워주면서 부모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때론 어린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 때문에 더 많이 채워준다. 그렇게 부모는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자녀에게 인식돼가고, 부모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되는지 모른 채 말이다.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은 사실 자녀보다도 부모 자신의 만족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자녀가 만족하는 모습을 통해 나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부모로서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뿌듯함, 채워주지 못했을 때 혹시나 자녀가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또래 아이들을 둔 이웃집과의 비교에서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만족감 등이 부모의 욕구들이다. 이 욕구가 클수록 부모는 아이 중심의 양육을 하게 되고, 이 양육 방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끝이 없게 된다.

자녀가 초등학교 나이 때까지만 해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지만, 중학교 이상의 청소년이 되면 점점 재정 부담이 커지고, 채워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녀와의 갈등이 커진다. 가정의 재정 상황과 학생 신분을 생각하지 않는 청소년 자녀의 요구에 부모는 철없다고 야단치지만, 자녀 입장에서는 그동안 잘 채워주더니 이제는 안된다고 하는 부모가 원망스러울 것이다. 자녀가 커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아이가 청소년이 돼야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이때는 늦었고,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으며, 부모가 나한테 했던 그 불만스러운 방식 그대로 자신의 자녀를 대하는 모순을 발견하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채워주지 않거나, 못했을 때 받는 상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자식 농사가 참 어렵다. 어느 목사님 설교에서 부모의 재정 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골프 레슨비를 요구하는 딸의 이야기가 나왔다. 힘에 부친 아버지가 이제는 뒷바라지가 힘드니 너도 알바를 해서 용돈 정도는 벌라고 했더니, 이 딸은 정색을 하면서 싫다고 말하고는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다. 끝내 딸은 아버지가 나를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오히려 화를 냈다. 이 말에 아버지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더 채워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딸은 사랑의 대상이지만, 딸에게 아버지는 욕구를 채워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니 아버지는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 안타깝게도 요즘은 주변의 많은 가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부모는 단순히 욕구를 채워주는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부족한 것을 함께 채워가면서 성장하는 동반적 관계임을 부모는 물론 자녀에게도 아주 어려서부터 일깨워줘야 한다. 그리고 채워주고 싶은 자신의 욕심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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