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내 오늘은 결단을 내리라. 호미를 들고 나선다. 마귀할멈의 매부리코 같은 호밋날이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고랑 끝으로 가서 해를 등지고 앉는다. 모자챙에 그늘이 매달린다. 호미 끝에 사각사각 경쾌한 소리가 묻어나온다. 이미 마귀할멈의 콧노래가 시작되었다. 비죽이 뻗어나간 바랭이의 허리춤을 한 손으로 거머쥐고 호미가 호령을 하면 싸라기 같은 개미알들이 우르르 딸려 나온다. 화들짝 놀란 달팽이도 숨을 곳을 찾느라 분주하다. 호미 끝에 묻어나오는 흙냄새가 상큼하다. 사각사각 흙을 헤집을 때 나는 소리는 상념에 젖는 내게 잔잔한 배경음악이 되어준다. 풀을 뽑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밀려났던 생각들을 한데 불러 모은다. 잊고 지낸 고마운 사람들 생각에 절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탈곡기에 이삭 털 듯 호미질 박자에 맞춰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를 뱉어낸다. 어떤 때에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혼자 웃기도 하고 가슴이 먹먹할 땐 잡초에게 혼잣말을 털어놓기도 한다. 내가 아무리 억울한 말을 해도 잡초는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니 그야말로 잡초가 있는 곳은 내 마음을 풀어 놓기에 안성맞춤이다.

한동안 호미질에 열중하다가 허리를 펴고 뒤돌아보면 손길이 닿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분명하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명쾌하다. 이런 즐거움에 조금 더 조금 더 욕심을 내다보면 어느새 밭 모양새가 말쑥해진다. 뒤돌아보는 마음이 흐뭇하다.

이쯤 되면 슬슬 욕심이 부푼다. 아니 마귀할멈의 심술이 시작된다. 마음속에 엉겨 붙은 더께를 떼어내듯 무자비한 호미질이 이어진다. 꼼짝없이 저항도 못 해보고 잡초들이 무참히 뽑혀 나간다. 폭력이다. 잡초에게 퍼붓는 폭력이다. 힘없는 생명줄을 마구 끊어내는 것이다. 맞다. 매부리코 호미 할멈의 저주가 시작되었다. 일방적인 공격에 잡초는 속수무책이다. 점점 거친 숨소리까지 쏟아내며 보란 듯이 폭력을 휘두른다. 화는 화를 부르고 악은 악을 부른다. 내게도 이렇듯 모진 습성이 숨겨져 있었더란 말인가. 잡초는 아무런 반항을 못 하는데도 악착같이 덤벼든다. 뿌리를 깊이 박고 소박하게 저항이라도 할라치면 도리어 내 안에 잠재되어있는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거늘 나의 선함에 대한 확신은 미소 뒤에 가려진 착각이었다.

밭두둑에 패잔병이 쌓여간다. 꼿꼿하던 자존심도 한낮의 볕에 어쩔 수 없이 무너져내린다. 폭삭 가라앉은 풀더미가 측은하다. 일방적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그들이다. 아무리 남새밭을 휘정그려 놓았기로서니 이렇듯 목숨마저 앗아버릴 것까지야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지, 그건 아니지. 제 있을 곳을 모르고 분수없이 세력을 넓혀갔으니 저들의 욕심에 대한 응징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을 응징할 수 있는 권한을 나는 누구에게서 받은 것인지 몰라 아리송하다. 나나 바랭이나 대지가 품은 같은 자식인 것을.

어느새 밭이 훤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승자의 오만인 양 뿌듯하면서도, 널브러진 잡초가 안쓰럽다.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잡초의 운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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