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이때부터 조관재 청풍부사와 관속들, 그리고 향촌 양반지주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들은 그동안 농민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찾아내 보복하기 시작했다. 관속들과 노비들은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마다 지키고 섰다가 ‘저 놈은 곳간을 턴 놈’, ‘저 놈은 불 지른 놈’, ‘저 놈은 양반을 죽인 놈’ 하면서 길가고 뭐고 가리지 않고 붙잡아 마구 난장을 쳤다. 심지어는 농민도회에 참여하지 않은 농민인데도 평소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잡아다 분풀이를 하고 곤장을 쳤다. 그들은 농민봉기 중에 자신들이 당했던 일에 앙심을 품고 그 전보다도 더 농민들을 핍박했다.

“저 놈 새끼, 저승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정신 못 차리고 또 포악질이랴?”

“지난번 관아 불태울 때 그 불구덩이에 던져버렸어야 이 꼴을 당하지 않는건데.”

“난리만 한 번 더 나면 조 부사 새끼부터 저잣거리에 끌어다 돌로 처죽일 거구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회장에서 사색이 되어 벌벌 떨던 조 부사와 양반지주들이 상황이 바뀌자 기세등등하게 돌변한 모습에 농민들은 더욱 심한 분노를 느꼈다.

한편, 안핵사 연창겸은 청풍농민봉기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이 과중한 수탈에 있었음을 확인하고 관아의 살림을 면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안핵사는 관아 창고는 물론 청풍에서 관할하는 읍창·북창·서창·동창 등 강을 따라 산재해 있는 수참의 재고 물량까지 모조리 조사를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창고마다 깨끗하게 비워져 있어 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수참의 세곡은 나라 살림의 근간이었다. 따라서 세곡을 사사로이 축내거나 착복하다 발각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최소한 효수형이었다. 조 부사는 이번 난리 때 농민군들에 의해 몽땅 탈취를 당했다고 그 이유를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봉기 초기 성난 농민군들에 의해 일부 양반지주들의 곳간이 털리기는 했지만, 농민지도부의 엄단 이후 사사로이 남의 물건을 탈취하는 일은 없었다. 또 관아의 창고는 별동대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되었기 때문에 농민봉기 동안 관아의 창고는 건드릴 수도 없었다. 그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는 관아 창고와 수참에 채워진 쇳대에는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 번도 창고문을 연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 부사는 농민봉기 때 모두 없어진 것이라며 핑계를 댔다.

안핵사는 관아의 모든 수취장부를 가져오라고 했다. 하지만 장부 또한 태반이 멸실된 상태였고 남아있는 장부도 기록된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조 부사는 세금을 떼어먹고 도주를 했거나 죽어서 ‘지칭무처’가 된 사람들이 많고, 설사 살아 있으나 형편이 너무 딱해 탕감을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또다시 둘러댔다. 안핵사는 조 부사의 말대로 ‘너무나 빈곤해서 거둘 게 없어 어쩔 수 없이 탕감을 해주었다’고 말한 마을마다 은밀하게 조사관을 보내 사실여부를 확인했다.

“환곡을 탕감해줘유? 그것도 부사가?”

“차라리 처녀가 애 배는 게 쉽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환곡을 탕감해?”

“탕감을 해줬으면 이 꼬락서니로 살겠슈?”

조사 결과, 조 부사의 보고는 모두 거짓으로 판명났다. 오히려 온갖 잡세는 조 부사가 청풍에 부임한 이후 배도 더 늘어난 상태였다. 잡세가 늘어난 만큼 고을마다 빈집은 늘어 어떤 마을은 절반이 넘게 비어있는 상태였다. 관아의 수세와 양반지주들의 빚 독촉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더구나 조 부사는 모자라는 세곡을 채운다는 빌미로 농민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일 년에 한 번 징수하던 세금을 두 번씩 걷어 들여 농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조관재 부사가 청풍에 부임하고 보니 관아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창고에는 먼지와 거미줄만 가득하고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장부뿐이었다. 조 부사도 관아 아전들이 거짓 장부를 만들어 고을민들로부터 걷어들인 세곡을 모두 떼어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전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착복한 세곡을 채우려고 했지만 그들의 반발이 워낙에 거세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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