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순우분은 술에 취해 회나무 아래서 깜빡 잠이 들었다. 이때 나타난 두 사자(使者)를 따라 회나무 아래 구멍으로 들어간다. 그곳 괴안국에서 임금의 환영을 받은 순우분은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딸을 낳고 남가군의 태수가 되어 태평성대를 누리며 20년을 살았다. 하지만 공주가 병으로 죽고 단라국의 침입으로 패하게 되자 순우분은 임금으로부터 돌아가라는 명을 받는다. 당나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아직도 회나무 아래서 잠을 자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도 이상하여 나무 아래 구멍을 파 보니 그곳은 개미 왕국이었다.

시멘트 콘크리트 아파트는 일 년 내내 같은 모습 같은 표정이다. 아침마다 잠에 겨운 지하 주차장이 검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다. 간밤에 피로가 덜 풀린 듯, 소화불량에 걸린 듯 출근하는 자동차들을 마구 토해낸다.

또 짐을 싼다. 쌌다 풀었다 해마다 봄이면 성화다. 동장군이 물러가다 다시 돌아와 한바탕 봄눈을 부려놓고 간대도 마음은 이미 봄을 따라나서고 마는 것이다. 베란다엔 화초가 말라 바스락거리고 군둑내 나는 묵은김치를 비우는 이맘때면 으레 병이 도지고 만다. 순우분은 술에 취하고 나는 봄볕에 취하고.

낭창낭창 콧노래 부르며 덩굴장미 목마 타는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간다.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머리에 이고, 거칠 것 없는 봄볕에 등 따순 항아리는 장 익는 소리에 두둥둥둥. 딱 치마폭만 한 밭뙈기에 상추 한 줄, 고추 한 줄, 완두콩 한 줄을 심는다. 아침이면 이슬 맺은 잔디에 운동화 코끝이 젖고 사각사각 호미질 소리에 흙냄새가 잠에서 깬다. 갑자기 나타난 지렁이에 소스라치는 건 자그마한 이벤트다. 만지면 흠이 갈까 손가락에 힘을 빼고 여린 상추를 솎는다. 연둣빛 상춧잎과 빨간 보리고추장에 참기름 한 방울 얹으면 십이 첩 반상이 부럽지 않다. 꽃다지꽃, 광대나물꽃, 누운주름잎꽃이 저마다 낮은 세상을 열어가고 조팝나무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면 벌들은 노동가를 부른다.

여름이면 몽실몽실 목화송이 흰구름 바구니에 모두 담으리. 파란 잔디 위에 하얀 이불 홑청이 바람에 날리고 희끗희끗 개망초 덩달아 여기저기 남실대는 곳. 한줄기 소나기가 대지에 축복을 내리면 내 안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탐욕과 어리석음의 찌꺼기도 씻어내야지.

가을바람 들깨 향 실어나르면 진한 커피 한 잔 들고 감나무 아래로 가야겠다. 바닥에는 도사리가 낭자하여 쉰내가 진동하는 그런 홍시라도 좋다. 젖은 낙엽 태우면 연기가 흐느끼며 남은 가을마저 거둔다. 늘 같은 듯 같지 않은, 무료한 듯 무료하지 않은 매일매일의 페이지를 탐닉하련다.

‘카톡, 카톡…….’

나를 깨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누군가 또 축하받을 일이 생겼나 보다.

오늘도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를 한 페이지씩 만들어 간다. 1층, 2층…20층. 엘리베이터는 쉼 없이 이야기를 실어나르고 오늘도 집집마다 개미처럼 성을 쌓는다. 베란다에 드리워진 얇으레한 봄볕에 겨워 잠시 개미의 왕국을 다녀온 순우분이 되었다. 콘크리트 성 아래에서 셋째 칸. 나는 그냥 103호에 사는 개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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