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직진 신호가 떨어졌다. 전봇대에 가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보이지 않았으나 당연히 초록불이겠지 생각하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도로 한가운데로 들어서서야 아차 싶었다. 오른쪽에서 요란한 경적과 함께 승용차가 내 옆구리로 바짝 다가와 멈췄다. 깜짝 놀란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신호등을 보았다. 빨간불이었다. 왜 그랬을까 후회막급이다. 콩콩 뛰는 가슴을 간신히 누르며 죄송하단 말만 연발했다. 상대방 운전자도 얼마나 놀랐을까. 늘 다니는 길인데도 신호체계를 착각한 것이다. 욕을 바가지로 먹을 생각을 하니 너무도 창피하여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는 차창 밖으로 나를 보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출발한다. 더 미안했다. 유난히 파란 하늘 아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상황이면 대개 욕설이나 큰소리가 터져 나왔을 것이 뻔하다. 평소엔 점잖던 사람이 주행 중에는 사소한 일에도 상스러운 욕을 하는 운전자를 자주 보아왔던 터이다. 나 역시 아찔한 순간을 만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거친 말을 쏟아내곤 했다. 어떤 때에는 내가 잘못한 줄도 모르고 휙 하고 상소리를 날려버릴 때도 있었다.

주행 중에 갑자기 앞에서 궁둥이를 들이미는 차를 만날 때가 있다. 여유를 두고 길게 들어오면 좋으련만 아찔하다.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려면 좀체 양보하지 않는 운전자가 야속하다. 나들목에서도 진입 차량을 위해 차선을 미리 양보해주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는 차를 만날 때 ‘배려’라는 말을 떠올린다.

내가 초보였을 때 다른 사람들의 배려가 간절했었다. 옆으로 휙휙 지나는 차들이 무서워 나의 속도계 바늘은 점점 더 늘어졌다. 차선을 제때 못 바꿔서 목적지를 지나친 적도 있었다. 다른 차 앞으로 바짝 끼어든 것은 상대 차의 속도감이 익숙지 않아서였다. 차선을 양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빨리 들어가지 못한 미숙함이었다.

운전 중에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선뜻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말로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고의 책임을 회피하려 목소리부터 키우는 사람도 있다. 아찔한 순간마다 혹시 내 탓은 아닐까를 먼저 생각해 보면 어떨까. 진정 베테랑 운전자는 남의 잘못도 너그러이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리라. 목숨을 앞에 두고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목소리를 키운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하는 말이다. 노자도 오늘의 나를 이렇게 가르친다.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교(長短相形), 고하상경(高下相盈), 음성상화(音聲相和), 전후상수(前後相隨).’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으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어 주고, 긺과 짧음은 서로를 이루어지게 하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를 채워 주고, 음향과 소리는 서로를 조화롭게 해 주며,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르게 해 준다.’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용서해준 그분이야말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이 시대 진정한 문화인이 아닐까. 내 탓이라 부끄러우면서도 가슴설레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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