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방앗간 모터 소리는 기염을 토했다. 희뿌옇게 올라오는 김 사이로 설핏설핏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피었다. 어머니는 이미 홑이불을 뜯어 빨아 풀을 먹이고 때가 찌든 그릇은 빨간 이쁜이 비누로 수세미질을 하셨다. 다락방에 잠자던 세간이 줄줄이 출두하고 어머니의 손발이 빨라지기 시작하면 명절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맏며느리의 명절 준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동서들의 일정을 확인하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정해진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반죽은 셋째가 해야 차진 맛이 나고 전은 막내가 해야 얌전하게 부쳐진단다. 어린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그러니 일의 절차나 순서에 따라 동서들이 시간 맞춰 나타나지 않으면 어머니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죄송해유, 형님.” 하면서 종종걸음으로 들어서는 작은엄마. 미안함과 반가움이 뒤섞인 얼굴로 손에는 신문지에 싼 돼지고기 두어 근이 들려 있었다. 소박한 정성이 그 안에 둘둘 말려있었다.

어머니의 지휘 아래 차례상을 위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구성되고 부엌에선 협주곡을 위한 손발이 척척 맞아 돌아갔다. 어머니는 둘째 서방님을 유난히 기다리셨다.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지범거리던 아이들도 모두 한곳으로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씨름과 권투를 시키며 땀과 혼을 쏙 빼놓았다. 연주자나 관객이나 모두 왁자글한 하루였다.

엄숙히 차례가 끝나면 우리에겐 장미가 그려진 접시가 하나씩 주어졌다. 그 순간이 우리 꼬맹이들에게는 명절의 백미였다. 어머니는 차례상에서 나온 과일이며 과자, 전들을 커다란 소쿠리에 모아 담으셨다. 도마를 앞에 놓고 앉으시면 우리는 각자 접시를 들고 엄마 앞에 빙 둘러앉았다. 기대와 설렘으로 잠시 엄숙한 정적이 흐른다. 그건 우리만의 질서였다.

가운데가 오목하게 패인 현란한 빛깔의 옥춘당, 달고 차진 약과 반쪽, 뽀얗게 분이 묻은 곶감 반쪽, 동그랑땡 하나에 생밤 한 알까지. 어머니는 모든 것을 등분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똑같이 나누어주셨다. 행여 옆 사람 몫이 더 크지 않을까 곁눈질을 해봐도 별로 득 되는 일은 없었다. 분배받은 음식마다 호불호가 있다 한들 그건 어머니의 소관이 아니었다. 각자 받은 접시를 들고 뒤돌아서면 서로 교환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조건과 수락이 오갔다. 우리는 진지했다. 일종의 거래였으니까.

중학생이 되어서야 그 대열에서 하나, 둘 빠져나갔다. 그건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암묵의 항변이었다. 이제 엄마 앞에 접시를 들고 기다리던 꼬맹이들의 풍경은 우리 집안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단출하게 상을 차리고 오붓하게 지내는 요즘의 명절은 아무래도 썰렁하다. 좁은 방안이 미어터질 듯 왁자하던 명절이 그립다. 반가운 얼굴엔 시뻘건 열화가 피어오르고 온종일 기름 냄새만 맡아도 마음 넉넉하던 그때가 그립다. 아버지 형제들은 족보를 펼치고 엄마와 작은엄마들은 행주치마를 펼치고 우리 형제들은 장난기를 펼치던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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