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 맞춤법은 조선시대의 것이 아닙니다.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말미암아서 그의 제자들이 운영한 ‘조선어학회'에서 정리하여 세상에 널리 펼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어땠을까요? 조선시대는 그냥 소리나는 대로 적었습니다. 띄어쓰기도 없었죠. ‘옌날옌날한시고레한소녀니살고이써따’라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쓰는 글의 상태를 400년간 이어왔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훈민정음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베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거기에 충실하여 적은 것입니다. 띄어쓰기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어와 일본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관행은 한자 때문입니다. 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독립된 뜻을 지닌 글이고, 그 글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뜻이 달라지는 글입니다. 따라서 굳이 띄어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죠. 죽간에다가 썼기 때문에 세로로 죽죽 늘여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는 대나무를 얇게 깎아서 거기에다가 글을 썼죠. 대나무가 아닌 종이로 바뀐 뒤에도 대나무에 쓰던 버릇을 버리지 못 하여 종이에다가 대나무 묶음처럼 줄을 그어서 인쇄했습니다.

이렇게 흘러온 3000년의 세월 속에서 훈민정음 400년의 세월도 끼어든 것이고, 그 거대한 흐름을 따라서 한자 표기와 똑같이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간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400년간 써왔다면 불편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행을 새로운 눈길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을 뜯어고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우리 겨레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말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어떤 눈으로 우리의 말글을 보아야 할까요? 아마도 중국어나 일본어는 이런 앞날에 좋은 본보기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문명 시대에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으니 말이죠. 따라서 새롭게 밀려드는 서양 여러 나라의 말글이 쉽게 참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참고 방식에는, 이미 쓰이던 말글의 관행이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하는 전제가 깔렸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일본어와 중국어입니다. 일본이나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띄어쓰기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천 년간 해온 자신들의 방식을 그대로 지킨 것입니다.

하지만 유독 우리만이 지난 400년간 해온 버릇을 버렸습니다. 즉 인도유럽어에 일반화된 띄어쓰기를 골라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띄어쓰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날마다 글을 쓰지만, 그 불편은 한 낱말을 건널 때마다 나타난다는 것을 아주 잘 압니다. 즉 낱말과 문장을 쓸 때마다 표준어와 맞춤법에 맞는지 신경 쓰죠. 날마다 달리던 길에 압정이 깔려 한 발 한 발 그것을 피해 디뎌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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