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렇소이다. 그런데 우 장군과 여러분에게 청이 하나 있소이다.”

“무슨 청이오?”

“북진여각에서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여러분들만 알고 비밀로 해주었으면 하외다.”

“우 장군! 깨끗한 돈만 받읍시다! 저런 속이 빤한 기회주의자는 언제 우리한테 해를 끼칠지 모를 일이오. 당장 내칩시다!”

상농군처럼 생긴 이창순이었다. 이창순은 농민도회 수뇌부 중에서도 강경파였다. 그가 최풍원을 면전에 앉혀놓고 모욕을 주었다.

“청풍 고을에서 최 행수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분이 우리 도회소 일에 앞장서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오. 돈도 곡물도 우리에게 뭐하나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우린 우리와 뜻을 함께할 사람이 더 중하오!”

우장규도 재물이나 내고 화를 피해보려는 최풍원의 속셈을 알고 거절했다.

“물론 나도 동참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소.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내 일신상 안일만 생각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리 북진여각은 관아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림을 꾸려나갈 수가 없소이다. 그런데 자기들을 질타하는 농민도회에 뒷돈을 주었다고 하면 당장 나를 잡아 죽이려고 할 것이오. 보잘 것 없는 늙은이 목숨이 뭐 그리 아깝겠소? 그러나 북진여각의 객주들과 보부상들, 그리고 그 밑에 딸린 가솔들까지 치면 일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을 매고 있소이다. 북진여각이 쓰러지면 그 사람들이 모두 굶어죽게 되오이다. 그러니 내 몸이지만 함부로 처신할 수 없는 처지를 봐서 늙은이 부탁을 한 번만 들어주시오!”

최풍원이 통사정을 했다.

“북진여각을 털어서 모조리 빼앗으면 될 것을 뭣 때문에 저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귀 아프게 듣고 있습니까? 안 그렇소? 여러분!”

이창순이 좌중을 둘러보며 지도부 일원들의 동의를 구했다.

“우리가 적도요! 우리가 남의 물건이나 빼앗으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이오. 그러려면 차라리 산적이나 도적이 되시오. 우리는 우리 농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을 하려는 것이란 말이오. 이 동지는 그렇게 얘기를 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소!”

우장규가 벽력같이 화를 내며 이창순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 바람에 좌중이 썰렁해졌다.

“송구하외다. 내가 분란을 일으킨 것 같아서…….”

최풍원이 진심어린 말투로 미안함을 표시했다.

“나는 최 행수가 지난 흉년 때 하미를 풀어 굶주린 농민들을 살렸던 것을 잘 알고 있소. 농민들도 그 공을 모르면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이오. 나도 최 행수가 다른 장사꾼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러나 만약 관아와 결탁해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우리 일에 방해가 된다면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소!”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오. 나는 장사를 하는 사람일 뿐이오. 장사를 해서 돈도 벌지만 그 돈으로 우리 고을민들이 좀 더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램이요. 우리 고을민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은 나도 싫소! 우 장군, 내가 몸으로 앞장은 서지 못하지만 마음은 여러분들과 똑같소이다. 그러니…….”

최풍원이 다시 간청을 했다.

“좋소! 그럼 최 행수께서는 북진여각의 객주 조직과 보부상들 그리고 동몽회원들을 북진의 농민도회 때 쓸 수 있게 지시를 내려 주시오. 그리고…….”

최풍원에게 요구조건을 제시하던 우장규가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우 장군, 무슨 말이든 해 보시오. 내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해드리리다!”

최풍원이 우장규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실은 지금 우리 도회소 운영이 매우 어렵소. 당장 이 사람들 먹을 양식조차 변변치 못하오. 그래서 양식이 좀 필요하외다.”

치부를 보인 사람처럼 우장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리도 쌀은 별반 없소. 지금 남아있는 것이 쉰 섬이 채 안 될 거요. 우리도 달린 식구들이 많아 전량을 줄 수는 없고 쌀 서른 석에 잡곡을 섞어 쉰 석을 주겠소이다. 그리고 차후 곡물이 생기면 더 드리리다.”

“북진여각에 쌀이 쉰 섬 밖에 되지 않는다니 그걸 누가 믿겠소?”

우장규는 물론 농민도회 지도부들조차도 믿기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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