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것을 전제로 해서 그 익숙한 것에 다다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수학급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말과 글이 그들에게 이런 차별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표기법과 맞춤법은 잘못이 없는 것인가? 지금보다 좀 더 편한 상태로 만들어질 수는 없었을까? 언뜻 보기에 물을 가치조차 없는 물음 같습니다만, 말과 글이 사람의 뜻을 남에게 옮기는 데 필요한 장치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런 물음은 우리 자신에게 언제든지 되물어야 할 그런 것입니다.

‘옌날 옌날 시고레 한 소녀니 살고 이써따’라고 읽으면서 글로 옮길 때는 ‘옛날 옛날 시골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라고 쓰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우리가 늘 되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에는 앞과 뒤가 있습니다. 꼬리와 머리가 있습니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과 글에서 말이 먼저고 글이 뒤입니다. 말이 머리이고 글이 꼬리입니다. 따라서 말을 따라서 글의 모양새가 결정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앞서 본 우리 말과 글의 관계는 뭔가 이상하죠. 글의 법칙 때문에 말을 그 법칙에 맞게 적어야 하는 과정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위의 문장에서 또렷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뒤인 것 때문에 먼저인 것의 매무새를 바꿔야 한다면 옷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거기에 몸을 끼워 넣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우리말은 소리 말이고, 소리 나는 대로 적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맞춤법 규정은 ‘소리 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꼬리를 달아서 소리 적기 원칙으로는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했죠. 문제는 그 보충이 소리 적기 원칙의 꼴을 많이 바꾸고 결정하는 바람에 뜻밖에 말글 읽기 능력이 달리는 아이들한테 어마어마한 폭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구성원 중 일부가 불편하거나 못 따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질문을 멈춘 순간 모든 생각은 폭력이 됩니다. 이런 소박한 물음 앞에 끝없이 답을 내놓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말글 학자들이 할 일입니다.

말과 글 사이에는 틈이 있습니다. 그 틈을 글로 메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글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어려워합니다. 따라서 말을 잘하는 아이들이 글을 배우기 위해 곤란을 겪는 일을 만들면 안 됩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끝없이 그 오차를 줄이려고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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