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테라피 강사

[충청매일] 생명은 살아있는 목숨이기도 하고, 살아가라는 하늘의 소명이기도 하다. 목숨의 의미, 목숨의 길이와 함께 필연적으로 죽음과 연관될 수밖에 없지만 모든 생명은 죽음을 회피한다. 생의 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사고이거나 노쇠이거나 생생한 생명력과는 다른 소멸 과정도 생명체로서는 피하고만 싶은 안타까움이다. 생자필멸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죽음은 슬픈 일이 된다.

고정순 작가의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는 죽음을 이야기한다. 멋진 시절을 뒤로 한 채 지팡이가 없으면 걸을 수조차 없어진 늙은 산양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들고 있던 지팡이를 힘없이 툭 떨어뜨린다. 그때부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지팡이를 계속 떨어뜨리게 되자 자신이 곧 죽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대로 앉아 죽기는 싫으니 죽기 좋은 곳을 찾기로 하고 짐을 싸서 떠난다. 무작정 떠났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생각 끝에 마지막으로 힘껏 달려보고 싶어 들판을 찾아간다.

‘집으로 가자.’ 결국 집으로 돌아온 산양은 다음 날 더 먼 곳으로 떠나 보기로 결심하고 오랜만에 편하게 잠자리에 든다. 지팡이를 옆에 놓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작가는 헌사 지면에 “나에게-”라고 썼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가고 작가를 아는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죽음이란 건 어떤 사람에게든 필연의 과정이다. 올 때는 누구의 무엇으로 왔지만 죽음 앞에선 오롯이 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인 나에게란 헌사 글이 더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본질 앞에는 늘 어떤 죽음이란 수식어가 붙게 마련이고 그 사람이 남기고 간 세인들의 평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묘비명에 새기기를 즐긴다. 죽음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어디서 어떻게 죽으면 좋을까를 생각한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고통과 남겨질 사람들의 삶도 생각해야 한다.

현실에 직면한 늙은 양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였나. 삶의 끝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려고 길을 떠났나. 현명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세월 끝에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에게 부탁한다. 내가 죽기에 가장 좋은 곳을 찾아보겠노라고.

의식이 가물가물한 순간에도 요양시설의 노인들은 절규한다. 고단했고, 누추했고, 애환이 있고, 아픈 상처도 있었지만, 그곳으로 가 죽고 싶다고. 평소처럼 마음 편하게 잠자듯이….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의 순간이동이라고 정리한 심리학자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볼 수 없거나 세상에 미련이라는 점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기도 하다. 죽음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이고 정리해야 할 과제 같은 것이라면,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출발점이라면, 결론은 사는 동안 잘 살 일이다. 죽기 전 너무 미련이 남지 않도록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는 최상의 방식은 주어진 시간, 생명의 기간을 잘 살아내는 일이겠다. 죽을 장소를 찾는 늙은 양의 이야기야말로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을 의미있게 해보고 순하게 넘어가자는 소박한 해석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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