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러나 농민대표 우장규는 유겸호와 입장이 달랐다. 우장규는 벌써 여러 차례 세곡과 환곡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농민들의 고충을 청풍관아와 충주감영, 한양의 비변사에 이르기까지 등소를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돌아온 것은 그것을 빌미로 관아에서는 더 혹독한 탄압을 농민들에게 가했다. 이미 합법적인 등소 방법으로는 농민들의 급박한 생존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농민들은 가진 것이 없으니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가진 것은커녕 먹을 것도 해결되지 않는 최악의 상태에서 하루를 더 산다 해도 나아질 것도 없었다. 이판사판이었다. 이제껏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온 날에 대한 분풀이만 양반들에게 퍼붓고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우장규는 이런 농민들의 분노를 모아 집단행동을 보여주는 것만이 가장 효과적인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우장규 집에서 열렸던 첫 번째 회합은 당장 봉기를 일으켜 관아와 지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농민들과 일단 합법적으로 관에 호소하는 등소하는 절차를 거친 후 그 결과를 지켜보자는 사족들의 상반된 의견으로 절충안도 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며칠 뒤 다시 회합을 가진 것은 광아리 천만이네 집에서였다. 천만이네 집에서 이차 회합을 가진 것은 그가 나무꾼이었기 때문에 관아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는 우장규와 유겸호를 비롯해 사족·농민·객주·부보상·사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들이 모였다. 일차 모임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각 계층이 모였다. 역시 회합을 주도한 사람은 우장규였다.

“여러분! 제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배를 주리고 창자가 등에 가 붙었는 데 생일날 잘 먹자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소. 지금까지 당하고 살아온 것도 억울하오. 이젠 부사와 아전들, 지주들이 정신을 버쩍 차리도록 뜨끔한 맛을 보여줄 때가 됐소!”

“그렇지 않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일이 벌어진 다음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집단으로 봉기를 벌이면 청풍관아야 쉽게 제압을 하겠지만, 그 다음 충주관아에서는 가만히 있을 것이며 공주 감영과 한양에서는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백성들이오. 조직적이고 훈련이 잘된 군졸들이 파견되면 우리 고을민만 상하게 됩니다. 감정만 앞세워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또다시 우장규와 유겸호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거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유. 급하면 지금보다 더 급하고, 상하면 지금보다 더 상하겠슈. 어젯밤에도 우리 마을에선 늙은이와 애들이 다섯이나 굶어죽어 나갔소. 이렇게 왈가왈부하고 있는 지금도 또 몇이나 죽어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오. 이건 사람 사는 마을이 아니라 사람 도살장이요, 생지옥이요. 개발에 편자지 내일이 어찌 될지도 모를 판에 무슨 다음을 생각하자는 것이유. 다 뱃대지 부른 놈들 매화타령이유. 살만큼 산 우리들은 당장 죽어도 뭐가 아깝겠슈. 티끌만치도 이런 세상 미련 없소이다. 우린 틀렸지만 우리 애들한테는 밥이라도 한번 포식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슈?”

이창순이 유겸호의 의견에 찬물을 끼얹으며 포악질을 해댔다.

이창순은 우장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를 했다. 이창순 역시 우장규처럼 피는 양반이었지만 몰락한 탓에 가난한 농민에 불과했다. 그의 외모 어느 한곳에서고 귀티가 나는 구석은 없었다. 그저 거름통을 지고 소를 모는 무식한 농사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농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농민들의 불만을 우장규에게 전달했다.

“그렇수다! 이런 개같은 세상, 잘나고 잘 처먹어 빤질빤질한 양반놈들 질린 얼굴 한 번이라도 보고 가면 저승길도 춤추며 날아갈 것 같수다!”

양태술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무지랭이 농민으로 북하리에 살고 있는 외거노비 출신이었다. 북하리는 청풍관아가 있는 읍성의 중심지역으로 김 씨들의 집성촌이었다. 김 씨네는 왕비를 두 명이나 배출한 위세 당당한 집안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김 씨들은 자신들의 집안이 뼈대 있는 양반임을 내세우며 대대로 그 행세와 권세가 대단했다. 청풍부사도 부임하면 열 일 제쳐두고 김 씨 집안의 어른을 찾아 인사부터 올렸다. 김 씨들 천하에서 타성받이에 타관받이까지 감내하며 그들로부터 평생을 천대받고 살아왔으니 양태술의 서러움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보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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