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우리 사회에서 활터는 어떤 곳일까요? 과녁 맞히는 곳이니, 사격장일까요? 활터를 사격장이라고 말해놓고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양궁장은 사격장이 맞습니다. 그러나 국궁장은 사격장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뭔가 찜찜합니다. 이 찜찜함이 뭘까요?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매스컴에서도 대서특필하고 텔레비전에서도 연일 독립운동가에 관한 보도가 쏟아집니다. KBS에서 독립운동가를 유명 인사들이 돌아가며 소개하는 꼭지가 있는데, 어느 날 ‘손병희’에 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손병희는 당시에 손가락질받을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는데, 그것이 일제에 얕잡아 보이기 싫어서 그랬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그 호화로운 생활의 증거로, 자가용 승용차로 외출하기, 활쏘기 같은 것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당시 일반 서민들에게 지탄 받을 만한 내용이었다는 얘기입니다.

활이 왜 사람들의 지탄 받을 만한 것이었을까요? 놀이에 비용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각궁에는 무소뿔이 들어갑니다. 바로 이 무소뿔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3·1운동 당시에 무소뿔은 외국에서 구해 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활터에서 활을 쏠 때는 반드시 기생이 붙어서 소리를 했습니다. 그것을 획창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악기도 뒤따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악기 구성은 3현6각입니다. 피리 둘, 대금, 해금, 장구, 북이 그것이죠. 때에 따라서는 장구만 쓰는 경우도 있고, 가야금을 대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형편과 여건에 따라 악기를 씁니다. 그래서 한 발 한 발 맞을 때마다 소리기생이 뒤에서 맞았다고 소리를 길게 뽑습니다. 그리고 연달아 3중이 되면 그때부터는 지화자가 더 따라붙습니다. 악단을 동원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활터에서 이러고 놀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지탄 받을 일이었을까요? 오늘날도 이것이 지탄 받을 일인가요?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주장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외교 사절이 오면 군악대를 동원하여 의식을 치릅니다. 이런 것도 지탄받을까요? 왕실에는 악대가 왕의 행차 때마다 곡을 연주했습니다. 고종은 활을 쏘러 갈 때마다 이런 행렬이 따라붙자 밑엣사람들이 너무 번거롭고 힘들다며 길 위로 구름다리를 놓아서 걸어 다녔습니다.

민간에서는 안 그랬을까요? 마찬가지였습니다. 고관대작들이 활쏘기할 때는 응당 소리꾼이 뒤따랐습니다. 활쏘기에서 소리는 필수요소였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생들은 반드시 활쏘기를 배웠고, 지체 높은 양반들이 활쏘기를 하는 데는 반드시 이들을 불러 소리를 하게 했습니다.

활터가 사격장으로 변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사격장으로 변한 활터에 가면 별의별 문구들이 행동에 제약을 가합니다. 그 제약들은 모두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사격장에는 안 어울리는 구절들입니다.

예컨대 인애덕행(仁愛德行)이니, 정심정기(正心正己)니 하는 말들은 조선 시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옛사람들 스스로 활터를 사격장으로 여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