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농민대표로 나선 우장규는 몰락한 양반이었다. 그는 본래 향교가 있는 교리 마을 출신으로 선조 가운데는 벼슬을 제수 받아 행세께나 하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변변한 벼슬을 한 후손이 없자 점차 가문의 위세가 기울어졌다. 후손들은 대대로 교리에서 살아왔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기반이 거의 없어 농민이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몰락했다. 더구나 선친이 지금의 능강 마을로 세거지를 옮긴 후 병을 얻어 일찍 죽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우장규 또한 자신의 명의로 된 토지 한 뼘 없는 빈한한 처지였다.

그에 비하면 사족 대표로 나온 유겸호는 형편이 좋았다. 유겸호 역시 우장규와 같은 교리 출신이었다. 그는 철종 연간에 출사하여 예문관 말직에 임명되었으나 외척들의 득세로 벼슬살이가 여의치 않자 노모의 병환을 핑계로 사양하고 향리인 교리로 내려와 대대로 물려받은 농토로 소작인을 거느리며 살았다. 그는 비록 벼슬아치는 아니었지만 한때 대궐을 드나들던 관원으로 고향에서는 명망이 높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지주 사족이었다. 향리에서의 고을민들에 미치는 이러한 영향력으로 청풍관아의 부사와 아전들이 유겸호를 고을 일을 의논하는 향회에 참여시키려고 여러 차례 종용했지만 그는 이런저런 핑계로 번번이 기피했다. 새로 부임해온 조관재 부사는 서신까지 보내 참여를 권했지만 그는 끝내 참여를 하지 않았다. 유겸호가 향회 참석을 거부한 것은 향회가 고을민들을 위한 회합이라기보다는 관아의 불법을 합법화시켜 고을민들을 착취하는 기구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사족들은 관아로부터 자신들의 불법을 묵인 받아 소작인들을 착취했다. 유겸호는 관아의 불법도 싫었고 사족들의 불법도 싫었다. 그저 어느 쪽에서고 자신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겸호가 항쟁을 모의하는 자리인 우장규의 집에 오게 된 이유는 관아에서 시행하는 통환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통환은 일종의 연대보증 같은 악습이었다. 관아에서 통환을 실시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할일을 백성들에게 전가하기 위해서였다. 지방의 수령이나 아전들은 수시로 관내를 돌며 고을민들의 살림살이나 고충을 살펴보고 이를 해결하여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 본연의 소임이었다. 그러나 그런 수령이나 관속은 없었다. 고을마다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이 세곡이나 환곡을 떼어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관아에서도 모자라는 세곡이나 환곡을 채워 넣으려면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이웃 서너 집을 모아 공동책임을 지웠다. 고을민들도 처음에는 몇몇의 이웃만 서로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도망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관아에서는 여러 가구를 한통으로 묶다 그것으로도 해결이 되지않자 온 마을을 한통으로 묶어 세금을 매기고 환곡을 빌려주며 이자를 받았다. 그러다 자신이 사는 마을에 도주자가 생기면 도망간 사람의 환곡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이 물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망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한 마을에 산다는 이유로 관아에서 징수하는 대로 물어내야 했다.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악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통환이 중앙관료를 지낸 양반집은 면제를 해주는 것이 관례였음에도 청풍관아에서는 유겸호에게까지 통환을 징수했다. 유겸호가 수차 청풍관아와 충주목사에게까지 직접 서신을 띄워 면제시켜줄 것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청풍관아에서는 향회를 거절하는 유겸호에게 보복하기 위한 처사가 분명했다. 이로 인해 불만이 고조된 유겸호가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우장규의 집에서 회합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회합에 참여하고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농민들의 항쟁 방법이 너무나 달랐다. 유겸호도 관아 부사와 아전들의 패악에 불만이 높았다. 그러나 봉기까지 일으키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유겸호가 회합에 참여한 것은 자신 혼자 아무리 통환에 대한 부당함을 관아에 등소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여러 고을민들과 힘을 합쳐 연판장을 올리면 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농민들은 당장 고을민들을 끌어 모아 난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유겸호 입장에서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었다. 난을 일으켜 잘못 되는 날이면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것이었다. 잘못되어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목숨을 날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억울하더라도 통환을 감수하는 것이 더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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