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도심 한가운데 조선왕릉, 선정릉
[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도심 한가운데 조선왕릉, 선정릉
  • 충청매일
  • 승인 2021.01.1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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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 경영학과

[충청매일] 조선왕조 518년간 27대 왕을 거치면서 42기의 왕릉 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중 선정릉, 헌인릉, 정릉, 의릉, 태강릉 등 8기가 서울 시내에 위치한다. 선정릉은 9대 국왕 성종(1457~1494)과 두 번째 왕비 정현왕후(1462~1530), 성종의 아들 11대 중종(1488~1544)이 모셔진 곳이다. 조선조 당시 선정릉이 있는 곳은 한양도성 밖으로 아주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다. 한강을 건너 아주 낮은 야산 평지에 자리 잡았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이 먼저 자리 잡았는데 이곳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1501~1565)였다. 성종의 아들인 중종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1491~1515)와 함께 고양시(서삼릉)에 있었는데, 문정왕후는 성종의 능인 선릉이 명당이라고 주장하며 중종을 장경왕후만 남겨두고 이곳으로 천장 하였다. 천장의 사유는 고양의 중종릉이 풍수지리적으로 장마 때 물이 차오르는 형국이라 불길하다 하여 봉은사 주지 보우를 동원하여 천장 하였지만, 실제는 본인이 사후 남편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실제 문정왕후는 사후 이곳도 장마철에 물이 차오른다고 하여 중종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태릉으로 갔다.

그런데 과연 서삼릉과 선정릉은 장마 때 물이 차올라 흉지였을까? 서삼릉의 장경왕후 능인 희릉은 당초 헌인릉 구역에 있었으나 그곳이 흉지라고 하여 서삼릉으로 천장 하였고, 중종이 죽자 장경왕후가 있는 고양에 모셔졌다. 그 후 인종의 능도 이곳에 세워졌고, 조선 말기의 철종도 이곳으로 왔다. 명종, 숙종 이후 역대의 후궁, 대군, 군, 공주, 옹주의 묘도 이곳에 만들어졌다.

선정릉은 한남정맥이 관악산 우면산을 거쳐 역삼동 일대에서 동진하는 청담동 언덕에서 남동쪽으로 분기된 산진처로 고도 50m도 안 되는 아주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 잡았다. 우측 능선인 대치 언덕 뒤로는 양재천이 감싸들며 탄천이 합수하고 다시 한강과 합류하여 청담 언덕 뒤로 흘러간다, 선정릉이 있는 일대는 뒤로는 역삼동이 있는 능선을 배산으로 좌우로 대치 언덕과 청담 언덕이 환포하고 양재천 탄천 한강의 삼수가 합수하는 평지 지역이다. 평지에서는 국세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면 한 치가 높은 곳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선정릉 지역은 대명당국의 요건을 충족한다.

조선조 당시 선정릉이 있는 곳은 한양의 외곽으로 산과 논밭으로 둘러싸인 농촌 지역이었다. 선릉의 원찰격으로 봉은사가 있고 이곳 일대는 봉은사에서 관리하는 땅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의 왕릉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모아는 곳은 여주의 세종대왕릉 영릉이고, 선정릉은 두 번째로 방문객이 많다. 그다음으로 고양의 서오릉과 수원의 융건릉이다.

장마철에 물이 차오르는 곳, 물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은 풍수지리적으로 흉지가 아니라 눈여겨보아야 할 명당지역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시장이 형성되는 곳, 기업이 들어서서 돈을 버는 곳은 물이 흩어지는 높은 곳이 아니라 물이 모여드는 낮은 평지 지역이다. 문정왕후는 중종, 연산군, 명종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사후에는 중종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태릉으로 모셔졌다. 문정왕후가 선정을 펼쳐 복을 쌓았으면 이곳에 함께 안장되었을 텐데 덕이 많이 부족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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