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벌써 삼 일째다. 짐을 싼답시고 집 안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반듯하게 각을 잡던 정든 책상은 이미 나를 외면하듯 삐딱하게 서 있고 나사 빠진 의자는 힘에 겨운 듯 덜겅덜겅 숨을 몰아쉰다. 마룻바닥은 허옇게 긁힌 상처가 안쓰럽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매일매일 쓸고 닦으며 자그마한 티끌 하나에 눈을 희번덕거리지 않았던가.

어느 구석에서 나왔는지 먼지를 뒤집어쓴 포장지가 헛기침을 한다. 지난 어린이날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남은 포장지였다. 녹이 슨 동전 하나는 바닥에 들러붙어 세월을 일러준다. 어처구니없는 쉬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백 원씩 벌금을 내라며 엄포를 놨던 생각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십 년 넘게 운영하던 공부방을 접었다. 이제 남들처럼 평범한 거실을 꾸밀 수 있다. 도배와 바닥부터 바꾸려니 우선 실내를 다 비워야 한단다. 이삿짐센터에 물으니 비용이 만만찮다. 재활용처리장에서 헌 박스를 모아 하나씩 짐을 싸기로 했다. 서랍장 밑에서 나온 녹슨 머리핀 하나에 추억이 새록하다. 바닥에 떨어진 티끌 하나에도 정이 뚝뚝 묻어난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마땅한 물건인데도 옛일이 생각나 한참을 망설인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디 걸린다. 세간이 담긴 박스가 쌓여갈 때마다 정든 아이 떠나보내는 양 서운하다. 이사 가는 것도 아닌 마당에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묘한 감정이 나의 손길을 멈추게 한다. 직접 싸기를 잘했다. 소중했던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는가.

언제부턴가 포장이사를 당연시 했다. 며칠씩 걸리던 일도 전문가에게 맡기니 한나절이면 족했다. 그 많은 세간살이가 마술을 부리듯 새 집에서 번듯하게 제자리를 잡았다. 물건 하나하나에 정을 돌이켜볼 겨를이 없었다. 빨리빨리 문화가 망각을 재촉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참 많은 것이 변해가고 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내 손으로 짐을 싸고 정리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돈이 좀 들더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려 했을 것이고 시간을 절약한다는 구실을 핑계 삼았을 것이다. 두문불출이 최선인 요즘, 여유라는 선물이 내게 주어졌다. 비록 살림은 야위었을망정 느긋함에 익숙해지는 중이다.

어느새 우리는 패스트푸드에 길들고 속성과 초고속에 마음까지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내 이웃을 돌아볼, 심지어 내 가족마저 눈여겨볼 겨를이 없었다. 늘 그 자리에서 그렇게 있으려니 무심히 대했다. 너무 빨리 달려왔다. 1등에게 박수를 보내기 전에 꼴찌의 발걸음을 읽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이제 잠시 멈추어보자.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면서 천천히 가보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성급해진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손때 묻은 세간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나를 불러 세운다.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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