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네놈덜이 무고한 나를 고변하고도 탈이 없을 줄 알았더냐? 이놈들, 이제부터 네놈들을 빼빼 말려 죽일테다!”
고을민들에게 나눠줄 환곡을 착복했다가 들통이 나 붙잡혀갔던 청풍관아 호방은 포도청을 가기도 전 충주관아에서 풀려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호방은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자기를 고변한 고을민들에게 분풀이를 다짐하며 이를 갈았다. 호방은 향시가 열리는 날이나 관아에 볼일이 있어 읍내를 출입하는 고을민들을 길목에 지키고 섰다가 트집을 잡아 분풀이를 했다. 또 세금을 바치기 위해 관아에 지고 온 물건을 보지도 않고 무조건 불량이라며 퇴짜를 놓았다. 심지어는 겁박을 해 고을민들의 물건을 빼앗기 일쑤였다. 한 번 고변을 당해 문책을 받고 돌아온 관아 서리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거리낌 없이 활개짓을 쳤다. 그러니 다시는 그들의 패악을 고변하려 하지 않았다. 억울해도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참는 것이 이런 수상한 시절에는 상책 중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백성들이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절이 어려울수록 부자들 곳간은 넘쳐났고 반대로 살 터전을 잃어버린 농민들은 관료와 양반·토호들의 농지를 병작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품팔이꾼으로 전락했다. 병작을 하거나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농민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많은 수의 농민들은 늘어만 가는 부채를 갚지 못해 품삯도 받지 못한 채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 부채도 갚지 않고 지주 집에서 요구하는 날품도 거부하면 매질을 당하거나 빚을 갚을 때까지 머슴을 살며 붙잡혀 있어야 했다. 어떤 농민들은 세금과 고리대금 등으로 진 빚을 갚지 못해 평생 개간한 농토를 내놓고, 양반·지주들은 이를 헐값으로 사들여 농장을 늘려나갔다. 이것은 결국 농민들을 파탄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그러자 마음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백성들 사이에서 온갖 사교가 만연했다. 백성들을 현혹하는 무리들은 현세에서 얻지 못한 복덕을 미래에 얻게 해주겠다며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기도 하고 말세론, 조선 몰락, 변란 예고 등 온갖 예언과 비기가 난무하자 불안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만큼 민심은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었다.
⑤ 북진에도 새로운 물산들이 밀려들다
이미 조선 팔도의 전통장인 향시도 점차 퇴락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북진여각이 관할하는 남한강 일대의 향시도 마찬가지였다. 장마당이라는 것이 서로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며 물처럼 흘러 다녀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곡물 같은 먹거리였다. 일단 먹어야 그 다음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양반과 부자들은 곳간에 곡물을 쟁여놓고도 곡물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썩은 쌀인 하미라도 한양에서 올라와 고을민들의 목숨줄을 이어주었지만 그마저 끊기고 말았다.
한양의 쌀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쌀값뿐만이 아니었다. 쌀값이 오르니 다른 물건 값도 덩달아 ‘미친년 널뛰듯’ 했다. 종래 한양에서의 쌀값은 상미 대곡전석도 다섯 냥을 크게 넘지 않았었다. 북진은 그보다도 싸서 넉 냥을 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말에는 일곱 냥에서 여덟 냥으로 오르더니 올 봄부터는 쌀 한 섬에 스무 냥 이상으로 폭등했다. 그런데도 한양에서나 농촌에서나 쌀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상인들은 더 큰 폭리를 취하기 위해 사재기를 했고, 상인들 또한 곳간 문을 잠근 채 쌀값이 더 오르기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장마당에 쌀이 나오지를 않았다. 양반들이나 부자들도 그동안 소작료나 고리대금으로 거둬들여 쌓아놓은 쌀이 폭등을 하니 앉아서도 거금을 버는 셈이었다. 조석으로 쌀값이 올라 돈이 굴러들어오는 데 내놓을 이유가 없었다. 값이 더 올라갈 때를 기다리며 그냥 움켜쥐고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처분하지 못해 골머리를 썩이던 하미까지도 덩달아 값이 치솟으니 돈 있는 양반이나 부자들은 이래저래 꿩 먹고 알 먹기였다.
“뭣 땜시 쌀금이 이래 오른데?”
“당백전인가 뭔가 하는 돈 때문이 아니라던가?”
“당백전?”
“그려 당백전! 대궐인지 뭔지 짓는다고 만든 돈때문이라는구먼.”
“돈을 만들었는 데 왜 쌀값이 오른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