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농민들은 모을 재산도 없었지만 모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모아 놔봐야 어느 놈 아가리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저 농민들이 바라는 최고의 욕심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과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따뜻한 한 끼 밥뿐이었다.

그래도 농민들은 고향에서 발붙이며 살아보려고 죽을힘을 다해 세금을 갚으면, 관아에서는 새로운 명목을 만들어 세금을 징수했다. 국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행방불명되어 생사도 모르는 사람, 나이가 많아 신역을 면제 받은 사람, 환곡을 떼어먹고 야반도주를 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들추어내어 같은 마을이라는 명목으로 이웃 농민들에게 공동책임을 지워 대신 세금을 내도록 강요했다. 심지어는 굶어죽은 사람과 젖먹이 어린아이까지 세금을 매겨 징수했다. 그런 세금들은 고스란히 부사와 아전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관아에서는 농민들이 세금을 떼어먹어 나라살림이 힘들다며 더욱 족쳤다. 농민들이 죽거나 도망을 치지 않는 한 관아의 세금을 떼어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견디다 못해 설령 도망을 쳤다 해도 그 세금은 남아있는 마을사람들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니 관아에서 실제로 떼이는 세금은 거의 없었다. 결국, 아전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축나는 세금은 대부분 자신들이 떼어먹고 문서를 농간질하여 농민들 이름으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가령 농민들이 세 사람 몫을 관아에 바치지 못했다면 그중 두 몫은 반드시 아전들이 협작하여 자신들의 뱃속을 채운 것이었다.

“농군이 낫 들고 일어서면 이판사판이여!”

“차라리 난리라도 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살아내기가 절박해진 농민들은 난리라도 일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농민들은 큰 욕심도 없었다. 욕심을 부린다고 얻어질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배나 부르고 등만 따뜻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농민이었다. 그런데 관아의 폭정이나 양반들의 억압을 견디다 못해 농민들은 유랑을 하거나 적도가 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 팔도 곳곳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공물이나 보부상들의 물산들을 빼앗았다. 농민이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이 좋아서가 아니라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생사가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농민을 도적으로 만든 자들은 관아와 벼슬아치들이었다. 재주라고는 땅 파먹는 것밖에 모르는 무지랭이들이 오죽하면 땅을 버리고 손에 농기구를 들겠는가. 북진의 인심 또한 더욱 각박해져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고, 마을에는 빈집들이 늘어나며 점점 황폐해져 갔다.

③ 한벽루에서 연회를 열다

“제놈들 배지가 부르니 우리 같은 백성들은 굶거나 말거나 안중에도 없지!”

“언제는 양반님네가 우리 생각을 하기는 했다냐?”

“그까짓 한벽루 고치서 뭐한댜! 그 돈 있으면 백성들 주린 배나 채워주지.”

“요새 조선 팔도에 그런 선정을 하는 원님이 하나라도 있다면 백성들 살림이 이 꼬라지겠냐?”

“그저 불쌍한 건 쌍놈으로 태어난 우리 같은 검불 인생이지.”

얼마 전부터 청풍관아 남쪽 강가에 있는 한벽루를 새로 중수하기 시작했다. 한벽루는 고려 때 지어진 누각으로 오백오십 년이 넘은 유서 깊은 누각이었다. 강물을 굽어보며 벼랑 위에 날아갈 듯 지어진 한벽루는 사방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버릴 경치가 없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벽루는 다른 누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모든 누각이 독립된 온채인데 반해 한벽루는 문의 왼쪽에 행랑채처럼 익랑을 거느리고 있었다. 구조를 이렇게 만든 데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었다. 누각에서 양반님네들이 풍류를 즐기려면 온갖 뒤치다꺼리를 상민들이 수시로 오르내리며 해야 했다. 그러려면 상놈들이 정자 마루까지 올라가야만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지체 높은 양반님네들 입장에서는 상놈들과 같은 공간에서 잠시라도 함께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양반과 상놈 간에는 엄연한 분별과 높낮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누각에 행랑채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본채인 누각보다 한 단쯤 낮게 행랑채인 익랑을 덧붙여 지은 것이었다. 수발을 하는 상놈은 익랑까지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음식을 나르는 상놈은 익랑까지 와서 양반보다 낮은 위치에서 구부리고 앉아 음식을 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양반들은 누각의 구조조차 상반을 구별했다. 한벽루는 청풍관아에 경사가 있거나 한양에서 내려오는 지체 높은 대감, 그리고 부임지로 가는 관리들이 잠시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며 연회를 베푸는 그런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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