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네놈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국법을 어긴 것을 인정한다는 게구먼.”

조 부사가 가재미눈을 뜨며 형틀에 묶여있는 밤중이를 내려다보았다.

“부사님, 지는 국법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땅만 파먹는 땅두더쥐구먼유. 지는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 수 없구먼유!”

밤중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저런 어리석은 백성을 보게.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삼는 나라에서 남의 집안 신주에 해코지를 했으면 그게 국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조 부사가 호통을 쳤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네 이놈! 지난 신해년에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웠다가 모가지가 날아간 것도 모른단 말이냐!”

밤중이가 무슨 말인가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만, 조 부사의 고압적인 호통에 말문을 열지 못했다. 밤중이는 억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송사가 일어나게 된 것은 두 해 전쯤 밤중이가 최 참봉에게 빌려 쓴 장리빚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두 해 전 봄날에 밤중이는 돌아가신 선친과 다시 일 년 만에 돌아간 제 아비와 어미의 장례식 때 최 참봉에게 장리쌀을 빌어 큰일을 치렀다. 밤중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농민들은 일 년 농사를 지어보았자 춘궁기를 넘기기도 어려웠다. 그런 처지에 장성한 자식의 혼사나 부모의 환갑잔치는 물론이고 집안에 대소사가 생기면 부잣집 높은 대문을 넘어 구차한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졸지에 당하는 상례는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상주 입장에서는 부모를 잃은 슬픔보다도 많은 문상객들에게 대접할 음식이 더 큰 부담이었다. 상례를 치르려면 여러 날이 소요되었으므로 먹어대는 음식도 대단했다. 궁핍한 살림에 빚으로 시작한 상례는 이레 만에 끝났지만, 선친의 장례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돌아가신 그해 가을걷이만 제대로 되었어도 장리 빚은 어느 정도 값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뭄과 장마가 되풀이되며 추수를 해도 농민들은 알곡 보기가 ‘며느리 턱수염’ 구경하기보다 힘들었다. 그러니 빚은 갚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엄두가 아니라 나락이 제대로 여물지 않았으니 갚을 것이 없었다. 들판에 곡식은 흉작이 되어 허깨비처럼 부실해도 최 참봉집 장리 빚은 오뉴월 풀 자라듯 불어났다. 이듬해 봄이 되자 밤중이의 빚은 개똥참외처럼 배보다 배꼽이 커져 있었다.

그해 봄 어머니마저 선친을 따라갔다. 그런데 어머니는 곧바로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 마을에 쌍초상이 나서 상여꾼을 구할 수 없어서였다. 하는 수 없이 밤중이는 상여꾼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를 윗목에 눕혀놓은 채 인근마을을 돌아다니며 여러 날을 허비했다. 마을 노인들은 ‘죽을래도 상여꾼 없어 못 죽겄네’라며 푸념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집식구들은 교대로 문상객들을 대접해야만 했다. 인근 마을을 돌며 상여꾼들을 데려오고 농삿일과 문상객 접대를 하며 어머니 장례를 마친 것은 삼칠일 만이었다. 근 한 달 가깝도록 상례에 들어간 비용은 엄청났다. 선친의 빚도 갚지 못하고 있던 터에, 세 곱절도 넘게 들어간 어머니의 상례 비용까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밤중이 어깨는 무겁기만 했다. 저녁에 자리에 누워도 빚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양친을 잃은 아픔보다도 빚 갚을 걱정이 더 컸다.

그러던 중 최 참봉의 아들 동탁이가 찾아와 빚 독촉을 했다. 동탁도 밤중이가 빚을 갚을 여력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보낸 최 참봉의 꿍꿍이는 다른 데 있었다. 최침봉은 밤중이가 부치고 있는 무너미 쇠조밭을 빼앗고 싶어 껄떡거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너미 쇠조밭은 밤중이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걸 개간하느라 마누라는 태중 아이를 둘이나 잃어버렸다. 그런 밭을 넘기는 것은 자식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식을 묻은 밭이었지만 개간이 끝나고 처음으로 농사를 짓던 해는 얼마나 좋았던지 달 밝은 밤이면 밭으로 달려가 한밤중에도 일을 했다. 그 일로 사람들은 그를 밤중이라고 불렀다.

자식과 맞바꾼 그런 밭을 최 참봉은 벌써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빚을 진 밤중이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호구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장리 빚인데 패가망신하기 전에 틀어막을 수 있는 밭이라도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더 늘어나 옴짝달싹도 못하기 전에 하루라도 속히 넘겨주고 마음 편하게 살자며 최 참봉을 찾아갔다. 최 참봉은 사랑채 누마루에서 먼 산을 보며 장죽을 털고 있었다. 밤중이가 뜰아래서 읍을 하며 연유를 고했다. 최 참봉이 헛기침만 하며 딴전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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