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문학작가회 수필가

 

하늘을 나는 까막까치도 둥지부터 마련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사는 세상에 내 집 마련은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선택이 아닌 필수다. 더욱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면 의·식·주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이 먹고 입는 것이 아니라 집이 있어야 한다. 황혼 인생길에서 내 삶을 되돌아 보며 어떻게 둥지를 마련했는지 그 과정을 생각하면 너무나 초라한 내 모습을 보는것 같다.

1960년대 초 중등학교 교사로 취직을 했고. 바로 이어 결혼을 했다. 가족과 정도 들어야하고 8남매의 맞이라 적어도 3년은 함께 살아야한다 는 아버지 말씀을 지켜야했다. 신혼생활이 주말 부부가 되기도 했고 어떤 때는 통근도 했다. 불편한 신혼 생활을 보다 못한 어머니의 권유로 1년만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냈다. 우리 부부는 모든 살림은 고향에 두고 단 봇짐을 꾸려 단칸 셋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다.

어느 시골 중학교에 근무할 때 일이다. 허술한 셋방을 얻어서인지 야근을 하고 저녘 늦게 퇴근해보니 연탄가스로 어린 아들·딸은 거품을 내뿜으며 방바닥에서 딩굴고, 아내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나는 주인댁을 소리쳐 부르고 김치 국물을 먹이고 해서 아이들은 깨어났지만 아내는 깨어나지 않아 병원에 가 산소호흡기를 꽂고 치료해 살아난 일을 생각하면 내집 마련의 꿈이 더욱 절실했다.

그 때는 왜 그리 전근을 자주했던지 1~2년이면 한번을 이사를 가야 했다. 방을 얻으려 다니면 “애기가 몇이요”하고 묻는다. 둘이라고 하면 “다른데 가보시요” 거절당하기 일수다. 그래서 전세집이라도 장만 해야겠다고 용돈도 줄여가며 저축만이 살길이라 판단하고 적금을 크게 늘렸다. 5년간을 꾸준히 저축을 하여 전세금을 마련했다. 사글세 단칸방에 살다 전세집을 얻어가니 대궐에 사는것 같았다. 둘째놈이 “아빠 이집이 우리 집이야?”하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눈치 빠른 큰놈이 “남의 집이야”하고 소리친다. 그리고는 다시는 묻지 않았다.

또 어는날 어린 것들이 엄마 시장간 사이에 크래용으로 하얀벽에 대서특필을 해놓았다. 집 주인이 와보고 화를 벌컥내면서 “아이가 있는 사람은 주지 말아야 했는데…”. 우리 내외는 죄 지은 사람으로 페인트를 사다 깨끗이 해놓고 노인이 왔길래 깊이 사죄를 했다. 새 살림을 나온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꼬박꼬밖 저축으로 모아온 돈과 은행 대출도 끼고, 옆방 전세도 놓고 해서 꿈에 그린 둥지를 마련했다. 이제는 아이들도 “아빠 진짜 우리집이야?”하고 묻는다. 나는 “그래 이제는 벽에 낙서를 해도 괜찮아, 우리집이니까”.

산업화 시대에도 내집 마련은 힘들고 어려운데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요즘 청년들은 어떻게 집을 장만할까. 둥지가 있어야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는데 요즘 미친듯이 치솟는 아파트 값을 생각하면 3포 4포세대가 생겨나는 서글픈 현실을 개탄한다. 홀로사는 사람의 60%가 집이 없이 산다고 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 중 40%는 월세집에 산다고 한다. 전세는 씨가 말렸다는 뉴스를 보며 코로나시대 호텔을 주거용으로 꾸민다는 발표도 있다. 궁여지책이지만. 긴 안목으로 주택난 해소를 위하여 모든 규제부터 과감하게 풀어야한다. 그래서 수요와 공급을 원활하게 하면 청년들에게 꿈에 그린 둥지를 스스로 찾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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