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강가 자갈밭에는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더미를 이루며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물 속에서 일을 하는 뗏꾼들에게는 한가하게 모닥불을 품고 있을 틈이 없었다. 물 속 추위를 견디다 못한 뗏꾼들이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강에서 나와 잠시 추위를 쫓을 뿐 모닥불은 혼자 타고 있었다.

봉화수는 심봉수를 따라 산판과 뗏목을 엮는 집하장을 쫓아다니며 세심하게 일을 배웠다. 심봉수는 거친 사람들 사이에서 평생을 나무를 만지며 살아온 목상이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산판에서 잔뼈를 불리며 살아온 심 객주만큼 그들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봉화수는 심 객주에게서 나무가 베어지는 산판에서부터 나무가 엮어져 뗏목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전수 받았다. 몸으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산판꾼이나 떼쟁이들을 다루려면 그들보다 많이 알아야 했고 먼저 앞서 일을 주도해야 했다.

“제 치에서 모자라거나 굽은 나무는 거기에 묶지 마시오!”

봉화수는 자를 가지고 일일이 나무 치수를 재며 간섭을 했다. 그러다 제 치수에서 모자라거나 옹이가 박혀 선재로 쓸 수 없는 것들은 이미 뗏목으로 엮여 있었어도 끌러 다시 엮도록 했다.

“거기 참나무는 바깥으로 당장 빼시오! 이 떼는 숯이나 구울 화목이 아니란 말이오!”

떼매기꾼들은 뗏목을 엮다 봉화수가 한눈을 팔면 슬쩍슬쩍 잡목들을 소나무 사이에 섞어 묶곤 했다. 이미 심 봉수에게 이들의 속임수까지 섭렵한 봉화수에게 잔꾀가 통할 리 없었다. 그럴 때면 뗏꾼들은 눈을 부라리며 험악하게 대들었지만 봉화수는 굴하지 않았다.

“이 재목들은 배를 건조하는 데 쓰일 나무들이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오! 그러니 절대 떼 위에 장작 강다리 같은 웃짐치기는 하지 마시오. 대신 안전하고 깨끗하게 떼를 몰아다주면 공가는 후하게 쳐줄 것이오!”

봉화수가 뗏사공들에게 선재에 쓰일 목재임을 강조하며 각별히 취급해 줄 것을 당부했다.

뗏사공들은 떼를 몰고 목적지까지 가며 잔돈푼이나 뜯어 쓰기 위해 뗏목 위에 옹기나, 땔감, 그 외 잡다한 물건들을 싣고 내려가곤 했다. 그것을 ‘웃짐치기’라 했다. 웃짐치기를 하다보면 아무래도 뗏목에 신경이 덜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다보면 여울이나 암초에 부딪치거나 떼가 풀어져 상처를 입기 일쑤였다. 봉화수는 뗏사공들에게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내 평생 이 바닥에서 떼를 매고 살았지만서도 댁처럼 지독한 사람은 처음 봤소. 내 당신한테 두 손 들었소! 그러니 이제부터 그리 검사를 안 해도 내 다 알아서 일꾼들을 독려할 테니 좀 쉬어가며 하구려.”

뗏목장의 우두머리격인 백돌이가 마침내 봉화수에게 굴복을 했다. 그 다음부터는 산판이든 뗏목장에서든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영춘 용진나루 뗏목장에서 두어 달이 흐른 후 팔월 말이 되자 배를 건조할 재목들이 모두 뗏목으로 엮어졌다. 이제 뗏목들을 북진나루로 옮겨야 할 일만 남았다. 그러나 봄부터 가뭄이 심해 갈수기가 계속되자 곳곳에 강바닥이 드러났고 띠배조차 띄울 수 없었다. 더구나 영춘에서 도담삼봉이 있는 매포와 상진, 단양을 거쳐 구담봉이 있는 장회까지는 여울들이 수도 없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새여울과 된꼬까리 여울은 남한강 물길 중에서도 가장 험해 뗏꾼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바닥이 드러난 물길과 여울이 도사리고 있는 이런 물길에서는 떼 한 동가리도 강 아래로 흘려보낼 수 없었다. 비가 내려 장마가 질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용진나루 주막집들은 연일 흥청거렸다. 할일이 없어진 뗏꾼들과 장사를 하러 올라왔다 발길이 묶인 선주들은 큰비가 내려 홍수가 져 뱃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눈만 뜨면 술타령에 투전판을 벌였다. 이런 때가 되면 용진나루에는 뱃꾼과 뗏꾼들만 모여든 것이 아니라 골짜기마다 누비고 다니던 등짐장수들과 일용품들을 팔러 다니던 방물장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로 들끓었다. 이들은 강 하류에서 올라오는 상선들을 기다리는 장사꾼들로, 사람들은 바꿈이라고 불렀다. 나루터 주막거리의 꽁지갈보들에게는 이때가 한몫 잡는 호기였다.

봉화수가 용진나루에 발이 묶여 있을 때 북진에서 오슬이가 올라왔다.

“형님, 대행수님께서 우 목수를 모시고 오랍니다.”

우 목수라면 용진나루에 사는 우복술 노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복술이 용진나루에서 목수를 하며 배를 짓기는 했었지만, 지금은 나이가 많아 일손을 놓은 지 여러 해가 지난 상노인이었다. 그래도 최풍원이 찾을 때는 무슨 연유가 있을 터였다. 봉화수가 오슬이와 함께 우복술 노인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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