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얼마 전 한 부부가 필자의 집을 찾아왔다. 오래 전 교회에서 만나 아내끼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부부가 함께 만나서 여유로이 이야기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하던 중, 지인 남편이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우~ 저는 오늘 제 아내가 너무 고맙게 느껴지네요. 너무 착하고, 나를 잘 받아주고 참아주면서 산다는 것을 알게 돼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라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냐고 물으니, 필자의 아내가 필자에게 하는 말과 말투를 보면서 본인 같으면 기분이 나빠서 화를 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는 안타까움이 숨어있다.

지인 아내에게 물었다.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따지거나 언쟁을 한 적이 있냐고. 그 아내는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서운하고,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지만 표현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표현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이 싫고, 자존심 상했던 때가 많았다고 한다. 남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직장 상사나 동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대면하고는 할 말을 못하고, 돌아서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바보 같고, 후회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런 자신과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할 말을 다하고, 당당하며, 심지어 남편에게도 큰 소리 치는 필자의 아내가 너무 부럽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아내들이 주변에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급한 일이 있어 돈이 필요한데도 남편에게 돈을 달라는 얘기를 못하는 아내들도 의외로 많다. 그리고는 혼자서 아파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냐고 물었다. 남편이 화를 낼 것 같다, 나를 미워할 것 같다, 남편이 돈을 주지 않고 거절하게 되면 너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남편이 화를 내면 무섭다 등이 그녀들의 대답이었다.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운 상황이다. 마음의 힘이 없는 아내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원인은 대부분 부모,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자랐느냐가 결혼 후 남편과의 관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어린 시절 딸에게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아버지의 존재는 점점 현실화되는데, 그러면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때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갈등의 시기, 즉 사춘기에 아버지가 딸에게 때로는 져 주어야 하는데 보통은 그렇지 않다. 강압적인 아버지의 태도나 아버지에게 대들면 버릇이 없다, 시집가기 전에는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갈등 상황에서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부모를 넘어본(이겨본) 경험이 없는 자녀는 어른이 된 후에도 윗사람(나이든 직급이든)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대항하지 못한다. 아내들은 남편을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한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경험한 아내들은 더욱 그렇다.

싸움에서 진(lose) 개(dog)는 이긴(win) 개(dog)에게 평생 복종하면서 살아간다. 자라서 이긴 개보다 덩치가 더 커졌는데도 항상 꼬리를 내리고 무서워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힘이 아니라 언쟁이나 의사결정에서 건강하게 아버지를 이겨본 경험이 많은 딸들은 결혼 후 남편과 동등하며 건강한 관계를 맺는 아내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남성으로서 아버지는 딸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이며, 딸의 행복을 위해서 어느 시점(주로 사춘기)에서 진 개로 살아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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