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평창과 영월 일대의 목재는 모두 남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영춘은 평창과 영월의 하류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두 지역에서 내려오는 목재들의 집산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벌목장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다.

벌목장은 영춘에서 영월의 맡밭나루 쪽으로 삼십여 리를 올라간 태화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 대체로 벌목은 낙엽이 모두 떨어진 늦가을에 시작하여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해빙기 직전까지가 작업 기간이었다. 이때는 낙엽이 모두 지고 난 후라 나무를 벌채하기가 수월하고, 산에 눈이 쌓여 벌채된 나무를 운반하기가 쉬웠다. 또 이때 벌채를 끝내놓아야만 해빙기에 맞추어 눈 녹은 물이 불어나 뗏목을 띄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풍원이는 심봉수의 안내에 따라 벌목장으로 올라갔다.

강과 연해 있는 산기슭에는 산판이 벌어지는 동안 벌목꾼과 목도군들이 기거할 통나무 움막이 지어졌다. 그 앞에는 제를 올릴 단이 돌로 거칠게 쌓여져 있었다. 산판에서는 벌채를 시작하기 전 반드시 산제를 올렸다. 육중한 나무를 다루는 일이라 인부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산제가 시작되었다.

“태화산에 거하시는 산신께 감히 고하나이다. 늘상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신 은공 깊이 감읍드리고, 이제 시작할 벌목에서도 무탈하도록 저희를 돌봐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술과 찬으로 공경을 다해 받들어 올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

벌목장 김광출이 간단하게 축을 마치고는 도끼를 들고 제단 앞에서 가장 가까운 아름드리 소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도끼를 들어 나무를 찍었다. 벌목꾼들이 소나무 주위를 돌며 음복을 했다. 자신들에 의해 잘려나갈 나무들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이보게 봉수, 우리 애들은 뭘 하면 되겠는가?”

산신제가 끝나고 풍원이는 심봉수와 일의 분담을 논의했다. 북진에서 데리고 온 동몽회원들은 벌목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우선 벌채꾼들과 목도꾼들이 수월하게 일할 수 있게 뒤에서 잡일부터 거들어주게.”

심봉수는 벌목꾼과 목도꾼들이 나무를 베고, 베어진 나무를 산 아래로 옮기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동몽회 회원들은 움막 살림과 벌목장 주변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줄 것을 주문했다.

“호달이와 돌병이는 일꾼들 식사를 책임지그라. 물개는 땔나무를 책임지고, 비호는 발이 빠르니 연락을 맡고, 강수는 나와 함께 북진 점방을 오가며 장사를 하도록 하자. 장배와 용강이는 힘이 좋으니 벌목과 목도를 한번 배워보거라. 그리고 모든 회원 관리는 도식이가 지도록 해라.”

풍원이가 각자에게 일을 분담시켰다.

산판일은 워낙에 험하고 위험한 일이라 사람들 또한 거칠었다. 이제껏 장바닥에서 거들먹거리며 살아온 동몽회 회원들조차 감내하기 힘든 살벌함이 산판에는 있었다.

산판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녀석은 돌팔매질 명수인 돌병이였다. 돌병이는 자신의 특기인 돌팔매질로 꿩과 토끼를 잡아 끼니때마다 산판꾼들의 입을 즐겁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추위와 위험에 시달리며 일을 하고 돌아온 산판꾼들에게 따뜻한 움막과 푸짐한 먹을거리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산판꾼들과 함께 일하는 장배와 용강이는 그들과 종종 충돌을 일으켰다. 조금만 방심을 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산판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벌목꾼과 목도꾼들의 신경은 독 오른 뱀대가리처럼 곤두서 있었다.

“야, 이놈들아! 산판이 무지꽁하게 힘만 쓴다고 되는 중 아냐? 요령이 있어야지!”

평생을 산판에서 굴러먹은 벌목장 김광출에게 장배와 용강이의 일하는 품새가 눈에 찰 리 없었다.

“그러다간 어느 귀신이 채가는 중도 모르게 뒈져!”

산판꾼들은 어리어리한두 사람을 사사건건 걸고 넘어졌다. 그것이 힘든 일을 하며 견디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곧바로 사고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해 산판에서 힘이 장사였던 용강이는 쓰러지는 아름드리 통나무를 피하지 못해 큰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크게 다친 용강이는 북진으로 실려갔다.

산판에는 금기도 많았다. 그것은 금기라기보다도 자연과 부닥치며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가 너무 보잘 것 없음을 깨닫고 두려움을 피해보려는 의식적인 행위였다. 산판꾼들은 해가 넘어가면 절대로 움막 밖 출입을 금했다. 뒷간을 가거나 어쩔 수 없이 바깥출입을 해야 할 때는 반드시 서넛이 무리를 지어 나갔다. 깊은 산중이라 수시로 출몰하는 호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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