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꿈세상 정철어학원 대표

[충청매일] 품삯을 받았다. 봉투를 받아들고 모두들 한 시름을 덜은 표정이다. 쌀을 한 말 사고 나니 몇 푼 남지 않았다. 그래도 좋다. 쌀이 떨어진 집에 우두커니 앉아 계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리다.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버스 안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쌀이 담긴 종이포대를 안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앞에 앉아 있던 내 또래 여고생이 쌀 포대를 받아준다. 교복에 대한 부러움으로 머쓱하다. 그래도 고맙다. 나는 스치는 상념의 그림자를 따라 상상 속 다른 세상을 거닐고 있었다. 어렴풋이 움직임이 감지되는 느낌에 정신을 차려 눈을 돌렸다. 여고생이 내게 자리를 맡아 줄 양으로 쌀 포대를 의자에 놓고 문 쪽으로 나가고 있다. ‘안 돼!’ 순간 버스는 정차를 하고 쌀 포대는 황망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쫘 르르르…. 버스 바닥 온 천지로 쌀이 흩어진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득하다. 밖을 보니 두 정거장을 지나 내려야 한다. 무조건 바닥으로 달려들었다. 창피함에 소름마비가 귓불에서 목까지 굳어 내린다. 하지만 콩나물버스 안에 꽉 들어 찬 다리 사이로 흩어진 쌀을 주어야 한다. 거의 불가능 하다. 정신없이 바닥을 훑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수 십 개의 눈동자가 뒷머리를 당겨 온 몸이 굳어진다. 헐렁해진 쌀 봉지를 거머쥐고 태연한 척 자연스런 걸음으로 걸어 달린다. 한적한 곳에 들어서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손이 종이포대와 함께 흐느낌으로 흔들린다. 눈을 질근 감고 어금니를 꽈악 물었다. 한참 후에야 집으로 들어갔다. 다행이 어머니께 저녁밥을 해드릴 수 있었다.

잊고 싶은 하루다. 하지만 얼굴 붉어지게 하는 그 날의 기억이 예고 없이 불쑥 불쑥 찾아온다. 피하고 싶은 기억이다. 하지만 그 경험은 나에게 힘겨운 난관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고 많은 통찰과 성찰의 시간도 갖게 했다. 그 아픔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고 쓰러질 듯한 곤경에도 강인하게 버티어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갖게 했다.

살아가는 수십 년 삶의 여정도 그날 하루와 같다. 멀리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는 삶의 가치와 소중한 꿈이 있음이 그렇고 그를 향한 처절하기도, 행복하기도 한 진한 여정이 그렇다. 삶은 만족한 성과도 있고 따듯한 정도 있다. 그 날처럼, 싫고 견디기 힘든 것도 있다. 하지만 그날 어머니를 향하듯 한발 한발 이겨내며 나아가야 하는 것, 그 속에서 배우고 깨닫고 성장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내가 가진 것은 없다. 단풍잎 수줍음에 가슴이 설레는 감성과 바위도 뚫을 것 같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이렇게 가진 것이 없어도 용기를 내어 나아가야만 하는, 그 날 하루와 같은 삶의 발걸음이다.

그날 하루도, 우리들의 치열한 삶의 과정도 소중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요즈음 온 세상이 코로나19로 새로운 전쟁터가 되어 치열하다. 많은 사람들이 휘청거린다. 나도 휘청인다. 하지만 이 과정 또한 언젠가 우리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리라 믿는다.

오늘도 주섬주섬 옷을 입고 일터로 향한다. 어딘가에 우두커니 있을 소중한 의미와 행복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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