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미술관서 이승희 작품세계 조명 ‘2020 TAO’ 展
기존 회화나 조각과 다른 도자회화라는 영역 개척해
“도자라는 매체에 함몰되지 않고 끊임없는 실험 통해
독자적 영역 구축한 작가의 예술적 실험여정 소개”

왼쪽부터 ‘공시성’, ceramic, Ø1400×5160pieces, 2019. ‘사유된 문명’, 도자, 철판, 각 64×140, 1993~2020. ‘크라이젠’ 연작, ceramic, 각 20×29, 2008. ‘꽃처럼’ 83×110, 백토_유약_신채. 대나무 연작 ‘물외물(物外物)’, ceramic, 철, 가변설치, 2017. 중국 경덕진 작업실에서 이승희 작가.
왼쪽부터 ‘공시성’, ceramic, Ø1400×5160pieces, 2019. ‘사유된 문명’, 도자, 철판, 각 64×140, 1993~2020. ‘크라이젠’ 연작, ceramic, 각 20×29, 2008. ‘꽃처럼’ 83×110, 백토_유약_신채. 2017. 중국 경덕진 작업실에서 이승희 작가.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 중 원초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흙을 통해 현대미술의 조형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는 이승희 작가(62)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그림을 잘 그린 배경에는 그만의 사물을 관찰하는 집중력과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그림을 잘 그리지만, 작품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옮겨 그릴 필요가 없다. 재미없는 작업이다. 고도의 계산된 상황을 던져 놓은 후 관객 스스로 의미를 발견해내는, 어떤 우연의 일치가 흥미롭다. 작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보는 이들의 몫이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더 이상 작가 개인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미술관, 전시 기획자, 평론가, 관객 등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전시가 거듭될수록 불필요한 요소들은 다듬어질 테고, 작품은 한층 성숙해지기 마련이다.

“나무가 햇빛이 드는 쪽으로 자라듯, 작가도 현재화 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만큼 자라는 것이다. 더불어 소통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세계명화라고 이름난 작품이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은 게 아니듯이,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공유한다면 자연히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미술관 전시가 갖는 공간의 권위도 작품의 성장 배경이 된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전관 전시라는 흔치 않은 기회가 갖는 의미다. 작가의 30년 생각이기도 하다.

2006년 개관한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관장 최정은)은 2020년 기획전시로 1990년대 초부터 2020년까지 이승희 작가의 작품 세계 30여년을 조명하는 ‘이승희: 2020 TAO’展을 마련했다. 김해미술관은 그 뿌리를 도예(陶藝)에 두고 있기는 하나, 명칭에도 나타나듯 ‘흙’이라는 매체가 가진 잠재력과 확장성 탐구를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고 있다.

이승희 작가를 초대하게 된 배경에 대해 최정은 관장은 “흙작업이라는 좀 더 근원적이고 폭넓은 인식을 바탕으로한 작가의 다양한 화두가 흙과 교섭하는 과정을 통해 고유한 양식을 확립하고 있다”며 “흙이라는 재료가 가진 가능성을 숱한 실험과정을 통해 도자 매체에 있어서의 모더니즘적 성취를 이끌어냈다. 흙작업을 통해 얻어진 의외의 결과가 현대미술에 큰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점에 가치를 두고 작업 전반을 살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기획전 제목이 된 ‘타오(Tao)’는 도자기의 도(陶)자를 뜻하기도 하지만, 흙물을 70회 이상 부어 말리는 반복적인 작업방식이 도(道)와 같다고 해서 지어진 작품 명제이다. 작가는 사유의 도구로서 ‘흙’이라는 재료의 무한한 가능성과 세라믹 고유의 제작방식, 전통적인 소재에 주목한다. 그는 도판을 만들고 흙물을 수십 번 바르고 말리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미세한 두께, 시유와 소성을 반복하는 제작 방식의 토대위에 그 누구도 모방 할 수 없는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해 나간다. 기존의 회화나 조각과는 다른 ‘도자회화(평면도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는 초기작 ‘사유된 문명’ 연작부터 도자회화의 시작을 알린 ‘클레이젠(clayzen)’ 연작과 장르 해체와 기술적 완성을 보여준 ‘타오(TAO)-조선백자회화’ 연작, 대나무 조형설치를 비롯한 최근작 ‘공시성(Synchronicity)’ 등 160여점을 선보인다. ‘흙으로 사유를 축적하다’, ‘흙으로 도자를 그리다’, ‘흙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실험하다’, ‘2020 TAO _ 공간과 시간으로의 확장’ 등 전체 4부로 구성됐다.

‘흙으로 사유(思惟)를 축적하다’는 초기의 작품들이다. 1993년 ‘사유된 문명’, 1994년 ‘사유와 꿈’, 1996년 ‘사유의 그늘’ 展은 “흙을 만지면서 생명을 느꼈다”는 흙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가 평생 흙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이자 도자에 현대회화 기법을 도입한 흙작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초기의 이 작업은 흙덩어리가 갖고 있는 물성의 원초적 표현으로 쓰임을 위한 도자기가 아닌,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 흙을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흙에서 나는 곡물과 식물을 형상화하거나, 돌덩이 같은 형태에 오브제를 연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재료가 갖고 있는 관념과 도자의 실용성을 지우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흙으로 도자를 그리다’는 2000년대 중반 중국 경덕진으로의 공간이동과 함께 다시 한 번 과감한 실험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도자의 평면회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도자가 평면형태로 완성되는 과정은 세라믹 고유의 제작방식을 따르고 있다. 유약과 소성온도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형태와 색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까지 4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흙의 종류, 수분량, 불의 온도, 염료의 농도 등을 매일매일 기록해 자신만의 조합방식을 찾아냈다. 이후 작품은 숙련된 기술과 고유색의 깊이를 더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현해 냈다.  

남인숙 미술평론가(미학박사)는 “‘클레이젠(clayzen)’연작의 도자회화는 ‘흙의 언어를 만들고자 한’ 작가 열망의 결실이다. 도자의 양감과 비색 모두를 평면 안에 그대로 되살리면서도 차원의 축소와는 달리 정신성의 깊이는 더욱 확장되고 깊어진다. 전통의 한 복판에서 적합한 흙의 언어를 길어낸 도자회화 양식은 통념을 넘어섰을 뿐 아니라 입체와 평면의 경계도 넘어서 분류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의 언어를 제시한다”고 했다.

‘흙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실험하다’에서는 대나무 설치 연작을 선보인다. 이 작업은 예술가로써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2015년 베이징 전시를 필두로 홍콩아트센터 전시,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초청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매년 전시장소가 바뀌며 소개되고 있는 작품이다. 현재 일부는 뉴욕에서 전시되고 있다.

대나무 숲을 도자조형으로 완성하는 이 작업은 많은 인력과 비용이 발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상을 현실화 하고자 한 그의 집념이 결실을 맺은 결과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보유하고 있는 작품 중 공간에 적합한 분량의 검은 대나무 작품 일부만 설치했다. 이전 설치방식과 차이가 있다면 나무를 지탱하는 철 구조물을 그대로 노출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고, 익숙한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의문을 던지며 대나무에 부여된 일반적인 상징과 관념을 넘어서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2020 TAO _ 공간과 시간으로의 확장’은 2019년 뉴욕개인전 ‘변형: 8mm의 공간(Transfiguration: space of 8mm)’ 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신작은 흙의 물성을 시각적으로 최소화하고 흙물 기법의 기술적 완성도를 극대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화면 위에 전통적인 도자기 형태는 사라지고 종이처럼 얇은 텍스처가 강조되거나 색감의 미세한 차이에 주목한 작품이다.

특히 돔 공간의 특수성(원형구조+자연채광)을 반영해 미술관 중앙홀에 설치한 대규모 작품 ‘공시성’은 치밀하게 계산해 제작된 세라믹 캔버스 160점을 원 형태로 조합해 바닥을 3cm 두께로 가득 채웠다. 풍부한 색감과 각기 다른 질감의 작품 위에는 계절, 날씨, 시간의 흐름과 빛의 방향 등 자연현상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비쳐진다. 이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이 공간과 시간의 영역으로 새롭게 확장되는 순간이다. 작가가 설정해 놓은 이 공간은 머무는 관람자의 경험(감정)이나 기호에 따라 수많은 우연과 새로운 의미 생산이 가능한 4차원적 장치가 된다. 전시가 무려 7개월 이상 지속되는 것도 작가의 의도와 맞아 떨어졌다.

김해미술관 전시 총괄기획을 맡은 김윤희 큐레이터는 “작가의 창작시기별 주요작품을 중심으로 흙의 물성과 전통도자 제작방식을 확장·해체·재구성하며 자신의 예술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추구해온 동시대미술의 예술적 성취를 가늠해 보고자 했다”며 “흙의 확장성, 건축과 도자의 연계를 지속적으로 모색해온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에서 도자(陶磁)라는 매체에 함몰되지 않고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이승희의 예술적 실험여정을 소개하기 위해 기획됐다”고 밝혔다.

작가의 중간결산인 ‘이승희: 2020 TAO’展은 ‘물, 불, 흙, 공기’에 대한 사색과 실험이 어떤 단계에 까지 도전이 이어질지 더욱 궁금해지는 전시이다. 그 과정은 남인숙 평론가의 말처럼 “흙의 언어를 조탁하는 연금술의 도정(道程)이면서 동시에 막대한 노동으로 점철된 예술가의 진지하고 고된 존재의 기록”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과정을 “내 작업은 그저 질문일 뿐이다. 흙길을 걷듯 흙길을 간다”고 이야기한다. 흙이 ‘생명’이라는 고유한 물성의 특징을 갖고 있어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부드러운 흙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오는 모든 우연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오늘도 마음을 청소하며 정리해 본다.”

작가가 작가노트에 남긴 말이다.

오브제처럼 취급되는 거친 표면의 도자들, 사유된 문명 시기에 보이는 사물과 흙의 우연한 만남, 미려(美麗)한 도자회화와 대나무 설치 등 작가의 30년 여정은 흙의 언어로 구성된 한 폭의 문인화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두루마리 그림 중간쯤에 있을 법한 흙의 산림 속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새로움을 개척해온 작가의 ‘흙길’이 이후 어떤 도전과 실험이 더해져 관객에게 즐거움을 줄지 궁금하다.

이승희 작가는 현재 박여숙화랑의 전속 작가로 오는 5일까지 서울 박여숙화랑에서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으며,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은 오는 29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로 재개관돼 오는 11월 29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조선백자, 민화 등 한국적인 미감에 현대적 변주를 완성해내며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작가로 입지를 다지게 된 작가는 2015년 영국 사치갤러리, 2016년 빅토리아앤알버트박물관 초대전에 이어  프랑스 도자기 생산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베르나르도에서 설립한 문화재단의 초대전, 발로히 국제비엔날레 초대전이 이어지고 있다.  

 

※작품 이미지 및 자료제공: 청주시립미술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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