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빚는 현대미술가 李承熙(상)]청주라는 지역성 넘어 동북아시아 대표 작가로
[흙을 빚는 현대미술가 李承熙(상)]청주라는 지역성 넘어 동북아시아 대표 작가로
  • 김정애 기자
  • 승인 2020.09.22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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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경덕진 작업실로 공간 이동…현재를 결정지은 전환점
넓고 깊어진 작업만큼 기회 다양…美 등 전 세계서 러브콜
청주시립미술관 로컬프로젝트 2020서 ‘공시성’ 展 개최
검은색 도자 대나무숲 눈길…불을 끈 전시장서 작품 감상
“호기심·의구심 유발…관객들 다양한 상상 할 수 있기를”
왼쪽부터 ‘공시성’_혼합재료_가변크기_2020. ‘공시성’- 혼합재료_가변크기_2020, 작품 부분. ‘공시성’. ‘공시성’_도자_모래_가변크기_2020.
왼쪽부터 ‘공시성’_혼합재료_가변크기_2020. ‘공시성’- 혼합재료_가변크기_2020, 작품 부분. ‘공시성’. ‘공시성’_도자_모래_가변크기_2020.
중국 강서성 경덕진을 오가며 작업하는 이승희 작가. 때마침 국내에서 전시가 여러 개 잡혀 있는데다, 코로나 19 때문에 주거지인 청주에서 장기간 체류하게 된 그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오진영기자
중국 강서성 경덕진을 오가며 작업하는 이승희 작가. 때마침 국내에서 전시가 여러 개 잡혀 있는데다, 코로나 19 때문에 주거지인 청주에서 장기간 체류하게 된 그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오진영기자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이승희(62) 작가는 감각적으로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현대미술의 한 표현 방법으로 흙을 빚는 작업을 활용한다. 도자(陶磁)·도예(陶藝)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릇이라는 쓰임에 머물지 않는다. 흙이라는 원초적 재료와 불(火)이라는 예측불허의 자연, 거기에 작가의 손과 기묘한 감각이 결합돼 만들어진 ‘우연한 무엇’이다.

결과물은 때로 버려지고, 때로는 예기치 못할 만큼 그럴듯하게 나타난다. 버리고 취하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무수한 실험과 시도라는 작업과정을 거쳐 작가의 눈에 홀연히 나타나 선택된 작품인 셈이다. 하여 전시장에서는 물질적인 작품의 형상(形像)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탁월한 안목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작업 경향은 매력적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 대 중반 IMF 이후 국내 화단은 급격히 척박해졌다. ‘작가의 길’에 대해 갈등할 수밖에 없던 그가 돌연 중국행을 택했다. 큰 모험이자 용기였으며 신의 한수였다. 북경에서 기차로 23시간 이상(최근에는 고속전철이 생겨 7시간정도)을 달려야 가 닿을 수 있다는, 도자기로 유명한 중국 강서성 경덕진(景德鎭)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가 경덕진을 새로운 작업공간으로 삼은 것은 필연적이다. 평소 백자(白磁)를 즐겨 작업하던 그이기에 중국에서도 단단하고 치밀한 백자의 으뜸지로 알려진 경덕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덕진은 중국의 국가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된 대외개방 도시로 유럽은 물론 외국에서 많은 도예가들이 들어와 작업하는 곳이다. 중국 송(宋)대에는 청화 백자 매병 등을, 원·명·청 시대에는 이른바 청화라고 불리는 우수한 품질의 자기를 생산해 유럽 등 해외에 수출한 도시다. ‘차이나’라는 어원이 만들어진 곳으로 도예가들에게는 성지인 셈이다. 

작업공간의 이동은 그 길이만큼 작가의 작품세계를 확장시켜 주었다. 넓고 깊어진 작업만큼 기회도 다양해 졌다.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전시러브콜을 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경덕진 작업 10여년 만에 청주라는 지역성을 넘었고 대한민국이라는 경계를 넘어 동북아시아권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어쩌면 그만큼의 시간이 다시 지난다면, 동북아를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이승희’가 돼 있을지 모르겠다. 때마침 국내에서 전시가 여러 개 잡혀 있는데다, 코로나 19 때문에 주거지인 청주에서 장기간 체류하게 된 그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코로나 19로 다들 어려운 때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전시가 3곳이나 몰려 잡혔습니다. 거리두기가 완화될 때 잠깐씩 전시장을 열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죠.”

청주시립미술관 ‘로컬 프로젝트 2020’(7월 2일~8월 23일),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기획전  ‘2020 TAO 이승희’(5월 8일~11월 29일), 서울 박여숙화랑 ‘이승희 개인전’(9월 14일~10월 5일)이 최근 전시가 끝났거나 현재 진행되고 있다. 

청주시립미술관(관장 이상봉)이 기획한 ‘로컬 프로젝트 2020’는 청주지역을 기반으로 30년 이상 꾸준히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온 중진 작가들이 대상이다. 이승희 작가에 이어 릴레이 형식으로 손부남 김정희 작가 전시가 예정돼 있다.

‘로컬 프로젝트 2020’에서 작가의 전시 주제는 ‘공시성(共時性· Synchronicity)’이다. 공시성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특정한 시기의 성질(性質)을 말한다.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분리돼 있기도 하지만, 또한 현재의 공시성 안에 내재돼 있기도 하다는 의미다. 어떤 현상이 의미상 일치는 있지만, 전혀 인과관계를 찾아볼 수 없는 비인과적 원리를 뜻하는 것이다. 유난히 천장이 높은 미술관 1층 전시장에 수백 그루의 대나무 설치작업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 본다.

 보통의 전시장이라면 하얀 벽에 유독 밝은 조명이 클로즈업으로 작품을 비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승희의 ‘공시성’은 이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린다. 불을 끈 전시장은 어두컴컴해 오직 대나무라는 사물의 윤곽과 도자기 질감만이 언뜻언뜻 보인다. 가만히 이 사물을 들여다보는 순간 평소라면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깊은 대숲에서 나는 바람소리다. 이는 결코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일 뿐이다. 소리는 전시장 천장에서 나는 각종 기계음이었다.

“시각이 열리면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불을 껐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다. 전시장에 불을 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 작품을 설치할 때 주변사람들이 말렸다. 하지만 고집을 피워봤다. 친절하다고 온전히 소통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컴컴한 전시장에 들어서서 이게 뭐야 하고 나가버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보이지 않지만 다른 뭔가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 호기심의 차이라고 본다. 새로운 상황을 피할 수도, 용기 있게 적극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관객 스스로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기 바란다.”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다.

이 같은 작가의 생각은 중국이라는 낯선 곳을 제2의 작업장으로 선택한 무모함과 일맥상통한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작업, 누구나 가는 상식적인 길은 재미없다. 작가가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자기 자신을 구체적인 현실이자 ‘텍스트’로 여기는 일이다. 작업의 원천이자 본성인 텍스트를 건너뛰거나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지 다양한 경험과 무모한 용기, 누가 뭐라든지 질러대는 배짱이 작가가 지니고 있는 텍스트와 함께 작품으로 나타난다면 그뿐이다. 예술가인 작가라는 텍스트는 탐구하라고 부여된 것이 아니다. 두렵고 어렵고 낯선 곳에 놓일 수 있는 용기로 성취된, 그 일상의 혹은 삶의 혹은 작업의 결과물을 전시장에 던져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경덕진이란 낯선 곳에 스스로를 던져놓은 시작이 ‘청주 지역작가’에서 ‘동북아시아권 대표작가’로 변하는,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지은 전환점이자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작가에게 낯선 곳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이며, 이곳에서의 14년은 수십 년 이어졌던 여러 관계와 단절을 의미한다.

스스로 선택한 고립무원 속 시간은 작가의 지난 삶을 뒤돌아보게 했다. 끊임없이 반복하고 실패하고 다시 실험하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했다.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지향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지난한 여정은 현실에 대한 여러 콤플렉스 덩어리가 먼지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도록 해주었다. 오랫동안 안고 살았던 콤플렉스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건 그것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것 자체가 작가의 정체성으로서, 텍스트로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동안 결핍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새로운 힘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로소 작가로서 진전됐다고 느낄 수 있었고 주눅 들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당당할 수 있게 됐다. 미국과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의 전시경험은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작업할 수 있는 작품관의 확장을 이루는데 유효했다. 

청주시립미술관 이연주큐레이터는 “작가는 ‘흙’이라는 질료를 단순히 작업의 재료로 보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사유의 도구로 쓰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1994년 첫 개인전 ‘사유된 문명’전을 시작으로 흙과 유약의 연구와 실험적인 도자 설치 작품을 통해 대상에 대한 관념과 인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지속적으로 해왔다”고 밝혔다.

흙으로 실제 대나무 형태인 원통형 마디를 제작해 구은 다음 철봉에 끼워 수백 그루의 대나무 숲 형상을 만들었다. ‘공시성’에서 표현된 도자 설치는 그의 조형 실험이 한 단계 뛰어넘어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소설가이자 철학자 알랭드 보통은 저서 ‘아름다움과 행복의 예술’에서 작가의 대나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해 놓았다.

“이승희는 대나무의 역사적 전통과 그 상징성을 이해하고 여기에 극적인 무언가를 추가한다. 가장 잘 부서지고 유연성이 없는 재료로 대나무를 재현하는 일이다. 바로 점토이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유연한 나무에 대한 기억과 인간이 만든 경직된 도자기 사이에 매혹적인 긴장을 창조한다. ……점토 대나무 숲과 천연 대나무 숲의 대립적 특성이지만 또한 우리의 특성이기도 하다. 작가는 우리 모두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는 숲으로 우리의 발길을 이끈다.”

다음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관장 최정은)에서 진행되고 있는 ‘2020 TAO 이승희’ 기획전이다. 이승희 작가의 작품 세계 30여 년을 한자리에서 조명하는 전시다. 미술관 돔하우스 중앙홀부터 2층까지 전관에서 16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김해미술관 1인 전관 전시는 미술관 개관 이래 김해미술관 관장이었던 신상호작가 전시 이후 처음이다. 

※작품 이미지 및 자료제공:청주시립미술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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