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정정엽의 “치열하게 될 대로 되기”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정정엽의 “치열하게 될 대로 되기”
  • 충청매일
  • 승인 2020.09.2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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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위반:울타리를 뛰어넘다
(5) 정정엽의 다정한 세계관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정정엽 작가의 ‘최초의 만찬 2’
미투 상징 서지현 검사·위안부 소녀상·나혜석 시인 등
시대는 다르지만 서로 만나면 좋을 것 같은 인물 초대

 

 

왼쪽부터 정정엽 作 ‘최초의 만찬 2’ 2019. 정정엽 作 ‘축제 7’ 2012~2013. 정정엽 作 ‘흙이 되는 자화상’ 2011.
왼쪽부터 정정엽 作 ‘최초의 만찬 2’ 2019. 정정엽 作 ‘축제 7’ 2012~2013. 정정엽 作 ‘흙이 되는 자화상’ 2011.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신의 대리인이자 그 자신이 하느님인 예수와 열두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모두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패러디는 페미니즘 미술계의 단골 주제였다. 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이 구도를 빌어 여성미술인들로만 이루어진, 혹은 역사에 남겨진 여성들을 오마주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던 바 있다. 정정엽의 ‘최초의 만찬 2’는 가장 최근에 제작된 ‘최후의 만찬’에 대한 패러디 작품이다. 나는 정정엽의 이 작품이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여러 역사적인 작품들 가운데 역설적인 의미를 가장 잘 살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먹어라, 이것이 내 살이다. 마셔라, 이것이 내 피이다”하는 예수의 말과 함께 일종의 제의(ritual)에 참석한 열두 제자는, 마지막이라는 선언적 시간의 한계에 대한 불안을 감출 수 없는, 어쩌면 뭘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혼란에 빠진 모습이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만찬의 자리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정엽의 ‘최초의 만찬 2’에 초대받은 이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마냥 즐겁고 유쾌해 보인다.

예수의 자리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일본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토 시오리와 우리나라 미투 운동에 불을 지폈던 서지현 검사)의 포옹이 자리 잡았고,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 사람들과 처음 본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거나 서서, 서로를 바라보거나 각자의 일에 빠져 있다.

흰 한복을 입은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근대화가 나혜석인데, 원래 사진에는 없었던 미소를 머금고 있고, 고릴라 가면을 쓴 게릴라 걸스도, 그 가면조차도 웃고 있다. 이 테이블에서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사람은 흰 털목도리와 모자를 씌운 위안부 소녀상이다. 그림 오른쪽 끝에는 손에 브이(V)자를 그리며 막 그림 밖으로 뛰어나갈 것 같은 사람도 있고 박수를 치며 다른 이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이도 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지난 시대를 살아왔던, 혹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기준은 순전히 정정엽 작가의 자의적인 선택이지만, 이렇게 자리를 만들고 보니 이들이 서로 나누며 만들어내는 사연은 정말 엄청난 이야기들이 될 것 같다. 게다가 정정엽의 ‘최초의 만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로 만나면 좋았을 것 같은, 시대와 지역이 다르거나 역할이 달랐던 여성들을 초대하는 만찬은 연작의 형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처음 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은 그림의 크기 때문이었다. 가로가 1미터에 세로가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이 그림은,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9미터 정도 길이에 이르는 장대하고 압도적인 그림인 것에 비해 놀랄 정도로 작은 것이다. 정정엽이 원래 작은 크기를 선호하는 작가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콩 알갱이, 팥 알갱이 같은 것들을 소재로 하여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만들어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압도적인 크기가 미술작품의 감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그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러, 다 불러”하고 온데 여성들을 다 불러 먹이는 활수 좋은 이 만찬은 한 번으로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념비적이거나 웅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혹은 거대한 기념비성과 뛰어넘을 수 없는 위계 같은 기존의 질서를 가볍고 기민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 형식으로 작은 크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민중미술 경향으로부터 작품을 시작한 정정엽은 처음에 비개성적이고 설명적인 특정 양식에 대한 쏠림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그가 설정한 관객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고요하게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식견 따위 갖출 시간도 없이 노동의 현장에서 고되게 살아가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미술의 ‘양식’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졌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작가인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작품이 보는 이들에게 무엇을 남기는지, 그리고 작품이 한 번의 지나침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의미를 증폭시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순간 그는 특정한 ‘양식’의 개념을 버리고 한 시절 자신을 사로잡는 방식에 충실하기 위해 한 사람의 그림일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양식을 구사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재현’의 범주를 떠난 적은 없으나 그것이 꼭 재현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경지에 이르기도 하고, 글과 그림이 섞이기도 하며, 캔버스를 빠져나온 설치작품이 되었다가 퍼포먼스도 되었다가 다시 공들인 재현의 그림이 되기도 한다. 정정엽 자신의 말을 빌자면 “치열하게 될 대로 되기”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치열하게 될 대로 되기”는 정정엽이 자신의 인생 앞에서 되뇐 말이다.

이를테면 2012년에서 2013년에 걸쳐 그려진 ‘축제 7’는 온갖 색상의 콩알과 팥알이 쏟아져 뒤섞인 모양을 그린 것이다. 미술 양식의 문법에 익숙한 이들의 눈에는 물감을 캔버스천에 흩뿌린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연상되기도 하고 거대한 붓을 가지고 캔버스에 돌진하여 격하게 부딪치는 흔적을 남긴 볼스(Wols)의 작품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 알 한 알 정성들여 그린 콩알들과 팥알들이 모여 만든 화면이다. 사실은 생명인 것들, 심어서 싹을 틔우기도 하고 우리가 먹기도 할 것들, 하지만 손에 한 줌 잡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한 알 한 알이 이쁘고 기특하게 생긴 것들, 정정엽은 한동안 팥알과 콩알들을 그려 화면을 채웠다. 붓질 한 번이면 될 것을, 하이퍼리얼하게 사람들의 눈을 속일 목적도 아니면서, 그는 콩이나 팥이나 양파나 고들빼기나 싹이 난 감자들, 나방이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 살겠다고 태어난 것들을 정성들여 그리기 시작했다.

살림은 살린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여성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며, 남성의 윤리가 정의의 윤리라면 여성의 윤리는 공동체와 생태의 윤리라는, 또 다른 이분법적 해석을 나는 경계하는 편이다. 온 인류가 직면한 자연과 사회의 제 문제에 여성적 보살핌의 윤리가 이제는 필요한 때라는 관점이 역사적인 맥락에서 어느 정도 공감이 되면서도, 남성적인 것의 대안이 여성적인 것이라는 말에는 여전히 의심이 간다. 이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여성적, 남성적이라는 표식을 붙이는 것에 대한 거리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정엽이라는 특정 여성 화가의 작품에서 나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질 수 있는, 그리고 미술작품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세계관을 본다. 사람을 포함한 세계 내 존재들에 대한 무한한 친밀감과 연민, 모든 것들이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고단한 과정 속에 있다는 통찰이 그의 작품에는 깃들어 있다.

2011년 작품 ‘흙이 되는 자화상’은 제목 그대로, 즐겁기도 했고 고단하기도 했던 삶을 마치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화가의 자화상이다. 자신의 초상화를 죽은 뒤 흙에 묻힌 모습으로 그리다니 참으로 당황스러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감긴 눈과 벌어진 입, 한쪽으로 약간 찌그러진 얼굴, 그리고 얼굴 위에 닿아있는 마른 식물들과 깃털, 그리고 부장품일지도 모르는 팥알갱이 무더기가 붉은 화면 아래에 숨겨져 있다. 이것이 인간과 자연의 마지막 교감이다.

남성이 문명의 상징이고 여성이 자연의 상징이고 어쩌고를 다 떠나, 여성이고 남성이고 제 삼의 성별이고 간에 이것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귀결이 될 것이다. 이토록 편안한 휴식이 도래할 것이며, 그것은 내일이 될지, 십년 후가 될지, 오십년 후가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먼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우리 여성은, 남성은, 모든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인간의 문제이다. <끝>

 

※ 그동안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를 집필해주신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근대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소재로 한 미술작품을 중심으로, 여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재해석한 기획연재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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