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일상성을 그림으로 노래하고 읊는 畵詩人
[사람&사람]일상성을 그림으로 노래하고 읊는 畵詩人
  • 김정애 기자
  • 승인 2020.09.15 1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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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완호(서양화가)의 삶과 예술세계(하)
왼쪽부터 ‘Work’, 1976, 캔버스에 락카, 유성매직, 59x90.5cm, 청주시립미술관 소장. ‘수석(壽石)’, 1986, 캔버스에 유채, 연필, 130×194cm. ‘나무’, 2004, 종이에 드라이포인트, 45x60cm, A.P, 유족 소장.
왼쪽부터 ‘Work’, 1976, 캔버스에 락카, 유성매직, 59x90.5cm, 청주시립미술관 소장. ‘수석(壽石)’, 1986, 캔버스에 유채, 연필, 130×194cm. ‘나무’, 2004, 종이에 드라이포인트, 45x60cm, A.P, 유족 소장.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故 이완호 작가(서양화)는 충북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서양화를 전공한 졸업생들의 작품 활동을 독려하는 의미에서 1986년 무심회화회를 결성했다. 무심회화회는 매년 무심갤러리, 국립청주박물관 등에서 전시를 갖고 회원 상호간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젊은 작가에게 작품발표 기회를 제공해 지역화단에 활력이 되었다.

현재 청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다수의 서양화가들이 무심회화회에 소속돼 있는 점을 통해 무심회화회의 결성이 청주지역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스승이자 함께 작업하는 동료 선후배들은 작가에 대해 “행동과 인격이 일치하고 늘 남을 먼저 배려하는 완벽한 실체였고, 그 삶 자체가 뛰어난 ‘예술작품’이었다”고 추억했다.

작가는 청주지역의 많은 후배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각자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작가는 평소 즐겨 생각하는 진솔한 단상들을 그림에 옮겨 놓기도 했다. 그 시어(詩語)는 작가의 모습을 의미하기도 했다.

‘메마른 날들이 이어지더니 소리없이 눈이 내린다. 주위의 고요함이 도드러진다. 큰 걱정 없이 이런 것을 느끼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복이다.’

이 시어는 작가의 묘비명이 되었다. 

윤우학미술평론가(충북대 명예교수)는 ‘이완호의 순수성과 일상성의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그 자체의 창조적 구조에 따라 그 가치의 평가가 이루어진다”며 “이것은 세월에 따라 더욱 가치를 불려가는 이른바 ‘수작(秀作)’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좋은 작품은 점차 귀해 간다는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완호의 작업은 이러한 구조에 이미 올라 타 있는 작품이라 보인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품이 미술계에 크게 드러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윤 평론가는 “작가 자신이 외적 조건에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 결코 아니었다. 어느 면에서 그는 그저 작업이 좋아서 작업에 열중했고 그런 만큼 크게 작업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도 별로 없었던 듯 했다”며 “그래서인지 그는 오히려 자신의 내면적 성격과 생각을 작업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었던 것도 같다. 한결 같은 대담하고 거침없는 필체, 일상성을 테마로 한 일기체의 시문이 화면 속에 녹아들며 단속적인 이미지들의 충돌과 동시에 결합하는, 마치 음악적 리듬과 같은 유희의 장면 등은 무아의 자연스러움을 뛰어넘어 국제적인 작가들의 빼어난 소묘와 조형 수준을 연상시킬 만큼의 수작들”이라고 평했다.

윤 평론가는 ‘문인화 같은 시적(詩的)세계’에서 화가로서의 예사롭지 않은 예민성과 스스로의 체질을 꾸밈없이 화폭에 담는 진실성에도 큰 장점이 있었던 작가였다고 회상했다.

“그의 작품에는 자전적 내용의 서체는 물론 체질적인 소담한 정서와 진지한 사색이 공존한 채 하나의 상징적 표현 언어를 화폭에 농축시켜 놓고 있다. 어쩌면 그는 시공간 속에 필연적으로 소진되어 가는 일상성을 그림으로 노래하고 읊는 ‘화시인(畵詩人)’으로서 우리에게 비추어질 수 있는 드문 형식의 작가라 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차원에서 그의 작업이 더도 덜도 아닌 진실한 눈길로서 재평가되기를 원한다. 맑고 곧은 서체는 물론 절도 있는 색채와 소묘가 형태적인 리듬을 타고 하나의 조형적 운율을 형성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개념적인 건조한 양식의 화풍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오히려 잔잔한 감성의 여운과 체질적인 예민함이 기묘하게 리듬을 탄 채 독특한 향취를 발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간접화법은 보는 자로 하여금 어느 사이엔가 동양세계가 갖는 소박하고 동시에 스며들듯이 깊은 정신세계를 한편에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캔버스의 바탕이 갖는 매질을 담백하게 살려 여백을 일구어 내는 구조 속에서 직관할 수 있는 표현어법으로서 쉬운 듯 어려운, 제작과정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마치 문인화의 제작과정과 비유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가 판화가로서 작업하는 과정에서도 기본 정서는 같다. 리프트 그라운드를 이용한 오목동판화의 경우도 붓 터치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그대로 살려내는 기법의 작업을 해 왔다. 장미와 나무 등 다양한 식물을 소재로 생명이 있는 자연의 한 현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는 것이다.

꽃은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반복해서 생각한다. 외부세계를 나름대로 정리, 해석해 결국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정리하고 완성을 지양하는 과정을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에게 표현요소로 등장한 사물들이 얼마나 실제와 가깝게 표현되느냐 하는 것은 관심 밖이다. 다만 작가가 의도한 효과를 위해 색채와 선, 터치, 혹은 물성(物性)을 도입해 그것이 얼마만큼 의도대로 상징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는 생전 인터뷰에서 “생활하며 기분 좋게 느낀 것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화면위에 옮긴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곧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사색과 명상이 뒤 따른다”고 했다.

작업은 작가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자신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와 맥이 닿는다.

“사람이 살면서 기본적인 것이 쌓여진 이후에는 자유로워야 한다. 일정한 테두리 속에 집어넣으려던 작업관에서, 작업은 작가가 근본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가장 큰 관심사를 자유롭게 드러내는 것이다. 얼마만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같은 작가의 생각은 작업의 소재가 폭넓고 다양해지며 표현기법 역시 작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도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화면에 내 달리는 소묘와 이미지 발생의 즉물적 표현성과는 달리 그 색감과 드로잉의 메시지에서 던지는 아련한 듯 흐르는 시상과 서정성은 당시의 격렬한 시각적 표현어법과 극한 사실성, 그리고 상업광고 같은 메시지들의 소란과는 상대적인 정온함을 지닌 작업으로 맑고 청아한 느낌을 담는 독특한 이미지의 작업이 되었다.

꼿꼿한 연필자국과 마치 수묵처럼 가해지는 색과 이미지의 절제된 일품적인 ‘합목적적 결합’, 아니 ‘융합’은 그의 일상에 대한 애정의 눈길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서양화의 문인화적 전개의 이색적인 만남인 동시에 ‘회화적 사색의 한 단상(모더니티)’으로서도 의미가 있다는 평이다.

작가는 화가이자 교육자로 청주에 살았다. 권영진 미술사학자는 “청주에서 생의 후반기 30년을 지낸 그는 한결 같이 존경받는 스승이자, 올곧은 동료, 탁월한 인품과 식견의 예술가로 추모되지만, 그의 예술과 창작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가 그림으로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그다지 진지하게 조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제자들의 고민과 진로를 잘 상담해주는 스승이었지만, 그 자신은 전문적인 예술가로서 다소 외로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작고 후에 열린 회고전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 상당수일뿐더러, 그가 평생 작업한 사창동 작업실에는 가족과 지인도 놀랄 정도로 많은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다니, 그에게 예술은 무엇이며, 무엇이 그토록 치열하게 작업에 매진하게 했는지, 그가 그런 창작으로 닿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작가는 청주에 살며, 가족과 아이를 보살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그 외의 시간은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화폭 위의 자신에 집중하며 30여 년간을 보냈다. 미술가로서 엄격하고 철저하게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강조한 ‘이완호의 수업방식’은 졸업생들 사이에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그의 미술교육은 두렵지만 잊을 수 없는 인생 수업이었고, 선배 화가로서 치열하게 작업하고, 철저하게 창작하며,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전통 문화, 재래의 미감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성실함을 강조 했다.

작가는 1980년 첫 개인전을 석판화 개인전으로 개최한 이래 생애 총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1992년 세 번째 개인전을 사진 콜라주와 파운드 오브제에 텍스트를 결합한 액자 작품으로 개최한 후, 1990년대 중반부터 두터운 표현적 필선으로 나무와 집, 식물 등을 그리고 글귀를 곁들이는 화풍에 전념했다. 나무와 집, 화초와 꽃 등을 짙은 마티에르의 필선으로 그리고 옆에는 짧은 일기와 감회를 글로 적었다. 2000년대에는 한층 가볍고 경쾌한 직선의 다발이 화면을 교차하는 ‘꽃’ 연작에 매진하는데,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 위에 붓과 연필로 예리한 직선의 다발을 속도감 있게 펼쳐놓고 일관되게 ‘꽃’으로 제목을 두었다.

2000년대 ‘꽃’ 연작은 드로잉적 요소, 서예적 요소가 강하다. 생명감을 상징하는 꽃의 모티프이면서 화가의 행위의 흔적을 그대로 기록한 액션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청각적 공명과 함께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직선의 다발 옆 여백에는 그날의 일기, 시상, 삶의 감회 등을 짧은 구절로 적었다. 글귀는 ‘꽃’을 그릴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짧은 사선을 강하게 저미듯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썼다. 문인화의 시서화(詩書畵) 일치(一致)가 화면에 구현되는데, 꽃을 그리는 방식이나 글자를 쓰는 방식에 모두 펜싱 칼 혹은 동판용 니들을 짧고 예리하게 새기듯 교차시키는 방법으로 직선 긋기를 반복했다. 그림인데 서도(書道)이자 검도(劍道)인 셈이다. 붓과 연필로, 검으로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수련하듯 그림을 그린 것 같다.

충북과 청주 화단의 그룹전과 단체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삶과 일상, 내면의 수행적 방법론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작업에 매진했다. 서예의 수련법으로 시(詩)와 서(書)를 곁들인 화(畵)를 펼쳐놓은 것인데, 심신을 수양하는 마음으로 그림에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삶과 일치하는 예술, 동서양이 조우하는 예술을 한결같은 실천으로 옮긴 것이 그의 ‘꽃’ 연작이며, 청주는 그러한 그의 삶과 화업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약력
1948년 경북 성주군 출생.
홍익대 미술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졸업.
2007년 4월 작고하기까지 30년간 충북대 인 문대 미술과 교수로 재직.
1980년 서울 태인화랑에서 첫 개인전 연 이후
1985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1992년
무역센터 현대백화점 미술관, 2000년과 2002년 청주 무심갤러리에서 전시.
단체전에는 제1회 서울 비엔날레전(1974, 서울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대미술 위상전(1982년 일본 교토미술관) 등을 비롯, 277회 참여.
기타 미술활동으로는 한국미술협회. 한국판화가 협회 회원, 충북판화가 협회 회장, 무심회화회 회장 등 역임.
충북도 미술대전 운영위원, 충북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충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2001 KBS 자연환경미술공모대전 운영위원, 충북도 도민대상 심사위원, 충북도 정책자문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선정위원, 충북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정부로부터 옥조 근정훈장을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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