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충청매일] 옛날에 황제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모든 문무백관들이 북쪽으로 배례할 때 황제만이 남쪽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문서에 황제라는 단어가 나오면 줄을 바꾸어 문장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황제와 이름이 똑같은 글자는 누구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황제를 하늘을 받들 듯이 대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을 반대한 황제가 있었다. 바로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이다. 그는 자신을 ‘하늘의 종’이라는 한 마디로 이런 특권을 거부했다.

이전 명(明)나라는 대륙의 중앙을 차지하여 물자와 산물이 풍부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가 부강하였다. 그 당시 북쪽 변방의 여진족은 사분오열로 갈라져 명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명나라는 신하들의 당쟁과 권력 싸움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진족의 수장 누르하치가 북방 여러 이민족을 통일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칭했다.

1619년 명나라에서는 후금을 제압하려 군대를 출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요하 동쪽을 잃었다. 그때 후금의 군대는 정예병사 15만 명으로 구성된 만주족 8기군이었다. 그 당시 명나라 한족은 2억 명이었고, 만주족은 100만 명에 불과했다. 계산적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비교였다. 그러나 만주족 8기군은 그 기세가 대단하여 북경에 입성하여 명나라를 굴복시켰고 이듬해 청나라를 세웠다. 이후로 무려 1000배가 넘는 한족을 268년 동안 통치하였다.

청나라 왕조는 초기에 고민이 많았다. 한(漢)족들이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혹독한 강압정치만이 유일한 통치수단이었다. 그러다가 제4대 황제 강희제 때에 이르러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강희제는 강압정책이 아닌 포용정책으로 통치 구도를 바꾸었다. 한족을 등용하려 애썼다. 등 돌린 한족의 저명한 선비와 학자들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실력 있는 선비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신설하였다. 하지만 한족의 사대부들은 단 한명도 응시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강희제는 명나라 역사편찬을 만주족이 아닌 한족에게 맡겼다. 그러자 명나라의 사대부들이 생각을 달리했다.

얼마 후 강희제는 만주족의 기상과 한족의 문화 융성을 결합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그 여세를 몰아 외부로 나라 확장에 나섰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억제하였고, 중앙아시아를 토벌하고, 위구르를 지배하였다. 그 외 동아시아 전역을 그 휘하에 두었다. 강희제는 정치를 이렇게 말했다.

“힘으로 지키는 자는 홀로 영웅이 되고, 위엄으로 지키는 자는 한 나라를 지킬 수 있지만 덕으로 나라를 지키는 자는 천하를 세울 수 있다.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정치의 최상이다.”

국궁진력(鞠躬盡力)이란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혀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강한 나라는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지도자가 있을 때에 이루어진다. 존중하고 경쟁하고 승복하는 것이 지도자의 인품인 것이다. 작금에 투표로 선출된 의원들이 당리당략에 빠져 국민은 안중에 없이 허무한 발언만 뱉어내고 있으니 심히 염려스럽다. 새로운 국회는 나라의 동력이 되어야 하고 국민을 살피는 전당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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