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냉이 꽃잎이 떨어지자마자 가벼운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꽃의 죽음을 신경 쓰는 이도 없었다. 꽃 진 자리에 좁쌀보다 작은 씨앗이 몽글몽글 맺힐 때도 그랬다. 물알은 씨앗마저 바람을 못 이겨 흩어져 버렸다. 자연의 힘으로 꽃을 피웠으니 화려한 시듦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공원에 심어진 영산홍, 형언할 수 없는 다양한 색이 눈부시다. 수북하게 떨어진 꽃잎도 화사하다. 꽃 진 자리가 이렇게 환할 수 있다니, 새 생명의 잉태를 축복하듯 떨어진 꽃잎은 한동안 시들지 않았다.

병든 고양이가 찾아온 것은 냉이 꽃잎이 바람에 날릴 때쯤이니 날 좋은 봄날이었다. 귀에 진드기가 가득하여 제 발로 긁은 상처에서 피가 나고 피부가 다 벗겨져 있었다. 보다 못해 사료를 사다 주고 약을 발라주었다. 약의 효력이 좋아서 금방 나을 거라고 했지만, 경과를 지켜보기도 전에 차에 치여 죽고 말았다. 꽃잎의 죽음과는 달랐다. 꽃 진 자리에 또 꽃이 피니 계절을 기다리면 되지만, 고양이의 죽음은 기다릴 계절이 없었다.

슬프지 않았다. 꽃잎이 져도 고양이가 죽어도 슬프지 않았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꽃과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할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벚꽃 잎이 흐드러지게 날리는 날, 우리는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찬란한 마지막의 축배를 들며 다시 돌아올 4월을 기약했다.

나의 술잔을 타고 무심천에 떨어진 꽃잎이 미호천을 만났다. 금강으로 흘러간 꽃잎은 난생처음 바다에 접했다. 불행하게도 팽목에 다다른 꽃잎은 자신이 죽음의 계절에 피는 꽃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더 이상 4월의 죽음 앞에 축배를 들 수 없음을, 생때같은 아이들이 차디찬 바닷속에 가라앉은 날, 누구도 축제의 날을 지낼 수 없음을 알았다.

엄마는 당뇨와 합병증으로 몇 년을 고생했다. 늘 오가던 병실이었지만,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호흡기에서 생의 그림자가 상형문자처럼 끼었다가 사라졌다. 아름답지도 찬란하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평온한 표정이 낯설었다. 그녀의 꽃잎은 벌써 지고 말았다.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꽃 진지도 오래다. 그러니 슬플 것도 안타까운 것도 없다. 생이 다한 생의 마지막이 평안하길 빌 뿐이다.

그러나 이별은 늘 가슴 아프고 슬프다. 부엉이 죽음이 그랬다.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정치개혁에 앞장섰던 그였다. 그래서 부엉이는 늘 힘들었고 외로웠다. 고단한 생을 걸었으니 젖은 날개 잠시 접고 쉬어도 되련만, 마지막 선택마저 고단했다. 그러니 애통하고 비통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도 부엉이처럼 산으로 향했다. 삶이 미안하다는 말로 쉽게 정리되는 것이라면, 무엇 하러 힘든 길을 선택했는가. 선택한 죽음이므로 애도의 방법도 선택 가능한 것인가. 한 생의 마지막이 누군가에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며 그동안 슬프지 않았던 죽음에게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생각한다. 냉이꽃에, 영산홍에, 나의 술잔을 흘러간 벚꽃 잎에, 가엾은 고양이에게 무슨 말을 전해야 할까. 부엉이를 따라나선 그를 애도할 수 없듯이.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