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뮤즈가 되어달라는 헛소리를 거두어라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뮤즈가 되어달라는 헛소리를 거두어라
  • 충청매일
  • 승인 2020.07.1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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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위반:울타리를 뛰어넘다 (1) 레오노르 피니의 이미지 역전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의 여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 비판
피니 작품에서 시간을 관장하고 초월하는 여성의 이미지 등장
‘세계의 종말’ 세계를 장악하고 파워있는 신적인 존재로 묘사
‘젊은 남성이 자는…’ 반인반수 검은 인물 피니의 얼굴과 일치
스핑크스 힘, 인간 남성을 지키는데 사용되는 힘으로 그려져
‘침실’에선 몸의 굴곡을 최대한 보여주며 잠에 빠진 남성과
그의 신체를 바라보는 존재인 여성, 시선의 권력 역전 보여줘
사진 왼쪽부터 레오노르 피니 ‘세계의 종말’ 1949. 레오노르 피니 ‘젊은 남성이 자는 것을 바라보는 지하의 신’ 1946’. 레오노르 피니 ‘침실’ 1941.
사진 왼쪽부터 레오노르 피니 ‘세계의 종말’ 1949. 레오노르 피니 ‘젊은 남성이 자는 것을 바라보는 지하의 신’ 1946’. 레오노르 피니 ‘침실’ 1941.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아이처럼 순진한 여성이거나 여신처럼 신비한 존재,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러한 여성상을 상상하고 만들어냈다. 영감과 사랑을 주는 이른바 뮤즈로서의 여성 말이다. 남성들에게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여성들에 대한 열망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 속에 다양한 형태로 형상화되었다. 성적으로 개방적이면서도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의외성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 그리하여 예술적 창조성을 북돋아주는 여성에 대한 사랑이 예술은 물론 인간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고 초현실주의자들은 믿었다.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전반에 세계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조로, 인간의 이성에 억눌려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에 구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 마지막 구절이 자주 인용되었고, 16세의 여성 시인 플라시노스의 첫 시집 ‘관절염에 걸린 메뚜기’에 열광하기도 하였으며,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의 부인이었지만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급격한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피 이후 그의 영원한 뮤즈가 되었던 갈라(Gala)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숭배했던 대표적인 여성상이었다. 실제로 갈라는 달리의 작품에 남성들이 갈망하는 에로티시즘의 화신으로 자주 등장했다.

여성에 대한 숭배와 사랑에서 창조력의 원천을 찾았던 초현실주의자들이 실제 현실에서의 여성이 맞닥뜨린 문제에는 관심이 있었을까? 초현실주의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에 대한 지난한 투쟁이 있었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여성이 처한 현실적 문제보다 특정한 관념의 옷을 입힌 상상 속의 여성상을 원하고 숭배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예술적 이념과 실험들은 미술의 지평을 확장시켜 새로운 세계를 열었으나, 그 경향에 동조하고 활동을 함께했던 여성 작가들의 경우 갈등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이론적 지도자 역할을 했던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을 포함한 남성 예술가들은 자신들보다 한 세대 어렸던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찬탄하고 때로는 연인이 되기도 했지만, 이념을 공유하고 서로 지지하는 ‘동료’로서의 의식은 다소 부족했던 것 같다. 때문에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중 특히 레오노르 피니(Leonor Fini)는 “내가 처음으로 적의를 느꼈던 것은 브르통의 엄격주의 탓이었다. 더욱이 그는 여성의 자유를 부르짖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거꾸로 그 본질을 이해하지는 않았다. 남자들을 해방하고자 하는 운동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이라고 말하면서 초현실주의의 남성 중심적 사고에 고개를 저었다.

피니는 앙드레 브르통이 여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여성에 대한 찬양이나 여신 같은 신비한 여성이라는 관념에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에 초대되었을 때 주황색 추기경의 옷을 입고 갔는데, 카톨릭의 사제는 여성이 원천적으로 배제된 영역이었기 때문에 선택한 역전의 코스튬이었다. 피니는 옷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인 상태로 신성한 추기경의 옷을 입고 나타나 남성들이 중심이 되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에서 신성모독의 느낌을 즐겼던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여성관에 동의하지 않았던 피니의 작품 속에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놀라운 여성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남성 화가들과 남성 주문자들과 남성 관객들이 염원하고 사랑했던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어딘지 무섭고 생각보다 관대하며 시간을 관장하고 초월하는 여성의 이미지 말이다. ‘세계의 종말’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동물들이 떠다니는 호수 혹은 늪에 몸은 담근 한 여성이 등장한다. 하트형 얼굴에 고양이 같은 이목구비는 레오노르 피니 자신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하늘마저 불길하게 먹구름과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이 광경 속에서 시든 식물들과 해골에 눈만 동그랗게 붙은 온전치 않은 동물들이 에워싼 가운데 담담하고 차갑게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반라의 상태이지만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강력한 기운이 느껴진다. 수면에 드리워진 그녀의 그림자는 또 다른 사람인 것처럼 기이하게 번쩍이는 눈빛으로 인해 더욱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다. 작품의 제목에서 지시하듯이 이 광경이 세계의 종말이라면 썩어가는 동식물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여성은 세계를 재탄생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것 같은 지상의 여신과도 같은 존재로 보인다. 아름답고 신비해서 여신 같은 감흥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장악하고 관장할 수 있는 파워가 있어보이기 때문에 신적인 존재로 보인다는 말이다.

피니의 작품 곳곳에는 화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등장하는데, ‘젊은 남성이 자는 것을 바라보는 지하의 신’에서도 반인반수의 검은 인물의 얼굴이 앞서 보았던 피니의 얼굴과 일치한다. 스핑크스를 연상시키는 검은 존재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은 깃털로 머리를 장식하고 푸른 벨벳으로 등을 덮었으며 머리와 목에 금 장신구를 두른,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알쏭달쏭한 존재이다. 스핑크스 형태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19세기에 대유행을 했던 팜므 파탈(Femme Fatale)이 단번에 연상될 수밖에 없다. 피니의 이 작품이 제작되기 오십년 전만 하더라도, 남성을 유혹하여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면 갈갈이 찢어버리는 무서운 반인반수의 여성상이 때로는 매혹적으로 때로는 살벌하게 그려져 왔다. 이러한 팜므 파탈로서의 스핑크스 이미지를 레오노르 피니가 몰랐을 리 없다. 피니는 스핑크스의 힘이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인간 남성을 지키는데 사용되는 힘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벌거벗은 남성의 전신은 기존의 미술사에서 줄곧 보아왔던 여성의 누드처럼 아름답고 무방비상태이다. 늘씬한 육체를 그대로 보여주며 성기 부분만을 실크 천으로 가리고 있는 매력적인 남성과, 그 남성의 잠을 지켜보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이미지의 역전은 피니의 작품을 관통하는 법칙이다.

‘침실’이라는 작품에서도 남성은 몸을 관객에게 잘 드러내 보여주는 방향으로 뉘어져 있고 몸을 일으켜 그를 응시하는 자는 여성이다. 여성의 얼굴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바로 그 얼굴, 피니의 자화상이다. 피니는 남성이 바라보고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받아온 과거 미술의 법칙을 정확하게 알고, 그 지점을 공격 포인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그림들 속에서 신화 속의 비너스나 디아나로, 성경 속의 수잔나이거나 밧세바로 묘사되는 여성들은 줄곧 남성 관객과 그림 속 남성들의 응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녀들은 줄곧 무방비상태로 혹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시선을 받아왔지만, 피니의 작품 속에서 시선의 권력은 역전되었다. 몸의 굴곡을 최대한 보여주며 잠에 빠져 있는 남성과 그의 신체를 바라보는 여성의 존재는 여성 자신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시선의 욕망을 가진 여성과 그 응시의 대상이 되어주는 남성, 이러한 이미지의 도치(倒置)는 이미지의 역사에 새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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