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충청매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시 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 또 들린다. 문득 지구촌 전체가 겪고 있는 감염병 시대에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궁금해진다. 어머니는 평소 스물이 넘는 자신의 혈육 하나하나의 안위와 건강, 그리고 그들의 꿈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아들이 조금 먼 곳에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집을 떠나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셨다. 때로 어머니의 기도에 동참하는 아들을 대견해하시고 고마워하셨다. 어디 아들뿐일까? 가족 모두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건강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고,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혈육 중에 누군가가 상을 받아서 기쁘면 기뻐서 기도하셨고, 그 중에 누군가 감기라도 들면 속상하셔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 병이 다 나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셨다. 아흔을 몇 해 넘기고 돌아가시던 직전년도까지도 봄, 가을로 2주일이나 계속되는 새벽기도를 다니시곤 하셨는데 기도 제목은 언제나 가족의 안위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기도만큼이나 달변가이기도 하셨다. 목소리도 크시고 주장도 강하셨다. 하신 말씀을 반복하실 때도 많았다. 우리 가족은 그때마다 다 아는 얘기지만 대목마다 장단을 맞추는 일도 잊지 않았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다. 하신 말씀을 반복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래도 젊은 시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시던 때의 일을 전장에 나가 싸우셨던 전사의 무용담처럼 몇 번이고 길게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 무용담 중에는 필자가 젊은 시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나도 발령을 받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인사권자인 총무처 장관을 만나 담판을 지어 필자가 바로 며칠 뒤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말씀을 가장 자랑스럽게 아주 여러 번 반복하여 강조하시곤 하셨다. 그 말씀을 하실 때 어머니의 음성은 늘 크고 당당하셨다. (그때 어머니께서 만나셨다는 분이 장관이셨다고, 적어도 우리 가족은 그대로 믿기로 했다) 그럴 때 우리 가족은 억양과 톤이 거의 비슷한 그 당당한 무용담에 장단을 맞춰야 했다. 딴짖을 하거나 하면 금방 불호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어머니 앞에 모여 앉아 웃으면서 어머니의 자랑스런 무용담을 경청해야 했다. 그래야 어머니의 기분이 좋으셨다.

어머니는 기도만큼, 무용담만큼이나 잔소리도 많으셨다. 절약이 몸에 배어 살아오셨던 세대셨기에 더욱 그러셨을 것이다. 특히 ‘아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전깃불을 그대로 켜 놓거나, 컴퓨터를 하는 사람 없이 켜 놓거나 하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여름이면 에어컨을 트는 일에 매우 민감하셨는데 그 이유는 전깃세 때문이었다. 전깃세가 그리 부담되지는 않는다고 말씀을 드려도 어머니는 에어컨을 켜는 일을 마뜩잖아 하셨다. 어느 해인가는 한여름에 어머니의 잔소리에 굴복한 필자가 오기로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잠을 청했다가 땀띠가 나서 고생한 적도 있었다. 

이제 어머니께서 세상 짐을 훨훨 벗어버리고 하늘나라로 가신 지 어느새 일 년이 거의 되어간다. 어머니를 보내고 우리 가족은 많이 슬펐다. 그 슬픔을 달래려 수시로 묘지를 찾곤 했지만 어머니의 잔소리가 없는 집안은 텅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절을 맞아 어머니의 잔소리가 새삼 몹시 그립다. ‘손 씻어라!’, ‘마스크 해라!’, ‘사람과 떨어져라!’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