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청주예총 부회장

[충청매일] 우리 부락 ‘탑선리’ 마을 입구에는 운동장이 설치되어 있다. 산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저녁만 되면 마을 주민들의 체력단련과 대화의 장으로서 선용되고 있다. 1일 4회 운행되는 시내버스 승강장도 그 앞에 있다.

며칠 전 저녁에 청주에서 출발하여 승강장 앞을 지나치려니, 마침 의자에 앉아서 ‘갑돌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쉬고 있었다. 갑돌이 아버지는 군대를 제대하고, 우리 집 윗방에서 살던 형인 ‘채(蔡)의사’ 때문에 우리 부락에 들어왔다가 주저앉아 뿌리를 내려 자수성가한 훌륭한 분으로서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지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현재 우리 집은 초등학교 교사를 신축할 때는 가운데방과 윗방을 임시교사로 사용할 만큼 큰 집이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는 객지에서 들어온 한 가족이 윗방에서 살았다. 윗방이라지만, 방이 두 칸에 대청마루가 있어서 다섯 식구가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인심 좋은 우리 아버지는 보증금이나 집세도 전혀 받지 않고 무료로 살도록 배려하였다. 우리들은 그를 ‘채(蔡)의사’라고 불렀다. 군대에서 배운 의술로 인근부락까지 의료행위를 하면서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몇 개월 후, 군대를 제대한 동생 하나가 형에게 의지하러 왔다. 바로 지금의 ‘갑돌이 아버지’였다. 묵을 방이 마땅치 않아서, 내가 쓰는 가운데 방에서 나와 함깨 취침을 같이 하였다. 그는 군대생활 이야기도 해주고, 배구도 함께 등 나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전답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굴뱅이’ 산골짜기에 들어가, 삽과 괭이로 나무뿌리를 캐고 땅을 파서 ‘팔밭(산비탈 밭)’을 만들었다. 나무뿌리를 괭이로 캐는 작업은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다. 결혼하여 살림을 차린 아내는 더욱 억척으로 일했다. 슬하에 아들과 딸 하나씩 얻었다. ‘갑돌이와 갑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그들 부부를 동네 사람들은 ‘갑돌이 엄마’ ‘갑순이 아버지’라고 불렀다. ‘고진감래’라더니! 드디어 그들 부부는 남부럽지 않은 훌륭한 가정을 일궜다.

버스 승차장 의자에 앉아서 우리는 오랜만에 지난 이야기를 나눴다. 23세에 우리 부락에 들어와 금년에 83세!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벌써 6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갑돌이와 갑순이도 장가들고 시집가서 손자, 손녀가 네 명이나 된다고 한다.

작년 가을에 갑돌이 아버지는, 전답을 돌아보려고 갔다가 풀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방광뼈가 부서지는 엄청난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나는 흰 봉투에 5만원 지폐 한장을 넣어 드리며 “제 작은 성의로 받아 주세요. 병원에 가실 때 택시비로 보태 쓰세요!”라고 했다. “고마워! 지금 의술은 참 좋아! 그전 같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라며 그들 부부는 눈물을 글썽인다.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밤 열시가 넘어서야 지난날의 따듯한 추억의 정을 다지며, 우리는 헤어졌다

며칠 후 아침 운동하러 나갔던 아내가 갑돌이 엄마가 마늘 밭에서 뽑아 준 마늘 한 자루를 가지고 오면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 같아요. 마늘이 다섯 접은 족히 될 것 같아요!”라고 감격한다. 문득 ‘가는 정이 고우면 오는 정도 곱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란 말이 생각이 났다. 갑돌이 어머니의 따듯한 마음씨가 우리를 더욱 따듯하게 하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60년의 따뜻한 세월의 정이 새롭게 되살아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