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통대학교
행정학부 명예교수

[충청매일] 최근에 다양한 죽음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천수를 누린 백선엽 장군의 죽음, 지도자 및 선배의 폭행과 갑질을 죽음으로 고발한 철인 3종 국가대표 최숙현 선수의 죽음, 성추행 혐의로 자살을 선택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이 하나같이 논란이 되고 있다.

죽음은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질병이나 수명을 다하여 맞이하는 죽음이다. 두 번째는 자연 생태계의 약육강식의 논리로 잡아먹힌 죽음이다. 세 번째는 자살이라고 하여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정지시키는 죽음이다.

6·25의 영웅으로 불리지만 친일 논란에 휩싸였던 백선엽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변혁의 시기를 겪으면서 백수 천수를 하였다. 그가 6·25 전쟁터에서 싸울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친일을 명분으로 현충원에 묻히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죽은 노장이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누가 우리 국토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싸울 것인가?

최숙현 선수가 자살했지만, 그의 죽음은 자살이라기보다는 사회 구조에 의한 타살이다. 최 선수는 수차례 걸쳐 폭행과 갑질을 폭로하였지만, 누구도 최 선수의 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절차를 핑계로 조사를 늦추고, 폭행을 지도라고 호도하고, 갑질 폭로는 해결보다는 더 큰 폭행으로 다가왔다. 최 선수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비록 대통령이 나서고 장관과 차관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피라미, 송사리 잡고 끝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높은 자살률을 걱정하고,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자처했던 박원순 시장이 성추행 의혹과 함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중단하였다.

종교와 민족에 따라서 자살에 대한 인식 문화는 서로 다르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한다.

반면에 불교나 유교에서는 조금은 관대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은 사람에게 매질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자살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때로는 미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죽은 자를 보는 문화가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정치적 명분과 이유로 조문하지도 않고, 죽은 사람을 SNS에 자기들을 선전하기 위해 이용하기도 한다. 박원순 전 시장의 자살은 그의 전력을 보았을 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자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자신의 죄책을 만천하에 자인하는 그런 죽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의 문화가 죄를 미워하는 것에 덧붙여 ‘사람을 미워하는 문화’로 바뀌는 듯하여 세상이 무서워진다.

모든 죽음이 안쓰럽고, 슬프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억울함이나 결백을 자살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사람들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살인자도 없고, 벌을 받는 자도 없이 죽음만이 존재하여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그 죽음이 사라져야 사회적 정의가 바로 서는 사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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