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질병과 늙음 (5) 앨리스 닐의 자화상
美 화가 앨리스 닐, 80세에 처음으로 자신의 누드 작품 남겨
파란색 줄무늬 의자에 앉아 하얗게 센 머리 틀어 올리고
손에 든 흰 천은 항복 의미하는 하얀 깃발 은유적으로 해석
늙어가는 신체와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의미의 작품
임산부 그림들에선 운신하기 어려운 신체 견디는 모습 그려
에로틱함이나 개념적인 행복 보여주는 모습과 거리 멀어

사진 왼쪽부터 앨리스 닐 ‘자화상’ 1980, 앨리스 닐 ‘임신한 여성’1971.
사진 왼쪽부터 앨리스 닐 ‘자화상’ 1980, 앨리스 닐 ‘임신한 여성’1971.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1900년에 태어나 1984년까지 살았던 미국의 여성 화가 앨리스 닐(Alice Neel)은 80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누드 초상화를 그렸다. 여성의 누드는 흔하디흔한 소재이지만, 여성 화가가 스스로 그리는 자신의 누드, 그것도 늙어버린 노년시절의 누드는 놀랍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물의 외양을 그리면서 그의 영혼까지 포착하는 화가, 일명 영혼의 연금술사로 불렸던 앨리스 닐은 자신의 벗은 자화상에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앨리스 닐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네 자녀 중 첫째 딸은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남은 세 자녀의 아버지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의 직업은 화가이거나 나이트클럽 가수이거나 유부남 영화감독이었고, 한동안 뱃사람과 살기도 했는데 그는 앨리스 닐의 그림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첫 번째 남편과 딸이 떠나간 후 죄책감에 시달리며 수시로 자살기도를 했고, 정신병원에 일 년간 입원하기도 했다. 한편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앨리스 닐이 그림으로 성공을 하려면 당연히 추상미술의 흐름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지만, 그녀는 추상미술이 공허하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미술계에서 평가받기 어려운 초상화의 영역에 줄곧 매달려왔다. 화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작품이 쌓이고 쌓여 노년에 들어서기 시작했을 때였다.

거칠게 대략적인 사실들만 읊어 보아도 산 넘어 산의 인생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했고 어느 날에는 FBI의 급습을 받기도 했다. 그녀의 거처에 출동한 FBI 요원들에게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적극적으로 청하니 그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슬금슬금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도움을 받던 심리치료사의 소개로 사회명사들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과거 거장의 명화가 아닌 이상 집에 남의 초상을 걸어둘 일 없는 부유한 컬렉터들의 지갑을 열게 해줄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애초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앨리스 닐의 임산부 그림들(도판 2)을 보면, 미술사에서 등장하는 그 많은 여성 누드들 가운데 임신한 누드가 없다는 점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임신한 자화상을 남겼던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의 작품이 예외적으로 남겨져 있지만, 그것은 임신한 여성의 일상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어머니가 된다는 기대를 담은 모습이었다. ‘행복한 어머니’의 모습을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렸던 18세기에도 이미 출산을 한 후에 아이들과 남편의 사랑을 받는 모습의 여성이 그려졌을 뿐, 임신 그 자체가 여성의 삶에 있어서 어떤 시간인지 솔직하게 그린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에게 있어서 임신은 자기 자신 뿐이었던 몸 안에서 다른 생명체가 자라는 놀라운 경험이기도 하지만, 변화되는 몸의 불쾌감을 참아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이후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의 시기이기도 하다. 앨리스 닐이 그린 임산부들은 임신과 출산의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걱정과 불안, 그리고 운신하기 어려운 신체를 견디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누드로 그려져 있지만 에로틱함을 자극하거나 개념적인 행복을 보여주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닐은 임신한 여성들을 그림으로써 미술사에 반전의 카드를 내밀었다.

앨리스 닐은 수많은 여성과 남성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임신한 여성들의 누드를 그리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누드로 남긴 것은 1980년의 자화상이 처음이었다. 다시 닐의 자화상으로 돌아가 할머니가 된 자신의 육신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그녀는 파란색 줄무늬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 하얗게 센 머리를 틀어 올리고 손에는 붓과 흰 천을 들고 있다. 흰 천은 유화를 그릴 때 붓이나 화면의 부분을 닦아 수정하는 용도를 가진 것이지만, 비평가들은 이것이 ‘항복’을 의미하는 하얀 깃발의 은유일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늙어가는 신체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미라고 말이다.

쳐진 가슴과 늘어져서 허벅지에 얹혀 있는 배, 그 사이에 움푹 들어가 있는 배꼽, 좁은 어깨와 앙상한 팔과 종아리는 전체적으로 축 늘어져 있는 몸을 감당하기에 버거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앨리스 닐의 눈빛은 자신을 똑바로 보려고 한껏 힘을 주고 있다. 치켜 올라간 눈썹 아래로 푸른 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한쪽 발의 발가락이 살짝 들어 올려져 있는데, 이도 역시 집중할 때의 버릇일 것이다. 얼굴과 목은 붉은 색이 올려져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밋밋해 보이는 노쇠한 신체를 그나마 생기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의자 이외의 다른 배경이 생략되어 있는 대신 푸른색과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의 색면들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도 이 그림 전체를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다. 평생 색을 쓰며 살아온 그녀의 인생에 쓰임이 되어주었던 기본색들이 단단하게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누드를 내보인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신체를 보호하고 결점을 감추어주는 옷을 벗고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상태에서 안경과 붓과 흰 천만이 그녀의 도구가 되고 주고 있다. 자신은 세상을 눈으로 보고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것만이 자신을 지켜주는 평생의 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화상인 것이다. 누드가 원래 이런 것이었나?

무엇보다 여성 누드는 신화나 역사 속의 이상적인 신체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남성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많은 누드들은 여성 신체를 에로틱한 대상으로 재현한 것들이었다. 과거의 미술작품을 소장한 어느 미술관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누드는 바라보는 시선에 대응하는 바라봄을 당하는 신체로, 여성은 실제의 일상에서는 보여줄 일이 없는 일상에서 벗어난 자세로 등장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고혹적으로 목욕을 하는 밧세바나 조개껍질을 타고 육지로 다가오는 비너스는 누드의 상태로 어떤 포즈를 취하고는 있지만 행위의 주체라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특히 남성 관객을 위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 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구현되어 온 것이다.

앨리스 닐의 80세의 누드 자화상은 이러한 문법에서 모두 어긋나 있다. 쳐지고 늘어진 육체는 이상적이고 정형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 너무 멀다. 게다가 안경을 쓴 누드라니, 보여주기 위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치켜뜬 눈과 꽉 다문 입매로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의 할머니 화가의 누드라니, 이런 그림은 우리 모두 본 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 닐의 자화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늙어빠진 할머니의 육체만이 아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계를 책임져왔던, 모진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았던, 예술에 대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그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한 여성 화가의 몸을 통해 그녀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게 되는 것이다. 보여지는 자가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으로써, 다른 이들의 초상을 그리며 그들의 인생사와 고뇌를 포착해냈던 바로 그 눈으로, 앨리스 닐은 자신의 육체를 그려냈다. 한때 아름다웠고 한때 힘이 있었지만, 그것은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의 이 모습이 남겨두고 싶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었다, 라고 이 그림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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