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오늘날 활터에서 흔히 보는 사법의 모양(궁체)은 전통이 아닙니다. 양궁의 영향을 받은 변형된 사법입니다. 즉 국궁 장비로 양궁 사법을 하는 형국입니다. 그런 사법을 두고서 전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는 이상해집니다. 즉 조선 시대 사람들이 활을 양궁처럼 쐈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드라마에서는 이렇게 연출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뒤 제가 겪은 혼란은 엄청났습니다. 우연히 동네에 있는 활터에 올라간 저도 처음에 반깍지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활터에서 선배들에게 배운 그것이 전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원래의 전통 궁체를 되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온깍지로 활을 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알아봤습니다. 그때 우리가 전국을 조사해본 바로는 약 30여 명이었습니다. 국궁 동호인 인구 1만 명 중에 전통 사법으로 활을 쏘는 사람이 30여 명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문제는 온깍지 한량들에 대한 다른 사원들의 핍박이었습니다.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활 쏘는 사람에 대해 꼭 잔소리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과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꼴통들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온깍지로 쏘는 순간 주변의 숱한 잔소리와 핍박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활쏘기의 지름길』) 전통 사법을 고수하다가는 미운털이 박혀 자칫 순교자가 될 어이없는 일이 전국의 활터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고립무원인 이들에게 모여보자고 제안을 했고, 그 첫 모임이 2000년 겨울 청주의 한 활터에서 열렸습니다. 30여 명 중에서 14명이 모였고, 그날 정식 모임으로 출범했습니다. 그것이 <온깍지궁사회>입니다.(『한국 활의 천년 꿈, 온깍지궁사회』) 깍짓손을 발여호미로 크게 뻗는 동작에 주안점을 둔 이름이었습니다.

때마침 인터넷이 활성화되던 시기(2000년)였습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활동 전 과정을 공개했습니다. 해방 전후에 집궁한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옛날에는 어떤 방식으로 활을 쏘았으며 오늘날과 어떤 점이 달랐나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습니다. 1년에 2차례 구사들을 모셔서 얘기를 듣고 그들의 시범을 보았으며, 또 모인 사람들이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작은 대회를 치렀습니다. 그렇게 딱 7년 활동하고 공개 활동을 접었습니다.

2000년 겨울에 활동을 시작했으니, 올해(2020)로 만 2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활터는 요지부동입니다. 아직도 반깍지 전성시대입니다. 결국 ‘전통’의 문제를 활터 구성원 전체가 회피하는 셈입니다. 전통에 대한 의문 제기에 활터를 주도하는 이른바 ‘명궁’들은 끝내 함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궁체를 바꿀 수는 없으니, 전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게 좋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새입니다.

그래도 다소 희망을 엿보이는 것은 젊은 세대의 반응입니다. 서울 석호정에 가면 대학생들이 활을 많이 배우는데, 거기서는 온깍지 동작이 대세입니다. 오늘날 활터에서 ‘전통’은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조조에게 계륵 같던, 그런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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