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왜 나의 시엔 웃음이 없을까. 시가 지닌 웃음을 추방한 플라톤 때문일까. 익살꾼과 재담꾼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일까. 슬픔과 분노가 넘쳐나는 시대에 나의 우스꽝스러움이 부끄러운 것일까.

플라톤처럼 애써 웃지 않는 이들이 있다. 농담이 통하지 않고 모든 이야기가 다큐로 받아들이고 심각해지는 대화들이 있다. 천성이 그렇다 하더라도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늘 농담만 일삼는 사람도 실없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진지함을 거부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그 또한 재미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웃음과 우스꽝스러움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유년 시절 사랑스럽지 못하고 꽤 잔인했던 두 스콜라 철학자는 각자 자신의 아버지가 아직 생존해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 스콜라 철학자가 각자 아버지를 죽이자고 제안하자 다른 스콜라 철학자는 어째서 패륜을 저지를 수 있냐며, 그보다는 내가 자네 아버지를 죽이고 자네가 내 아버지를 죽이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대답했다.’

플라톤은 농담을 듣고 절대로 웃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로 사람이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단지 하찮은 것,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치부하고 스스로 웃음을 감추는 것 아닐까. 그보다는 나의 농담에 짜증을 내는 이가 더 나아 보인다.  인간의 수많은 감정에서 분노와 폭력의 감정보다 웃음과 눈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행복한 삶을 영유하지 못할 것이다. 시에서 볼 때 웃음과 눈물은 같다. 시는 인간의 감정을 표출하는 최고 수준의 기술이며, 언어를 통해 우리를 울리고 웃기는 것이 시다. 다만, 시인이라고 모두 웃기지는 않는다.  

익살꾼과 재담꾼은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높은 학식과 정신을 가진 자라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스스로 웃음과 눈물을 만들지 못하는 이들은 다른 이를 통해 웃음과 눈물을 경험해야만 한다.

몇 해 전, 수몰로 모두 떠나고 남은 이웃이 벗 삼아 살아가는 고향에서 3일간 판소리 공연을 진행했다. 첫날, 오지 않던 동네 아저씨들까지 함께한 판소리 완창이었다. 놀부의 심술에 손가락질하고 흥부가 쫓겨나면 안타까워하고 박에서 쏟아져 나온 금은보화에 모두 기뻐했다. 듣는 이도 노래하는 이도 모두 행복해지는 시간이었다.

광대는 예전부터 웃음과 눈물을 팔아먹고 사는 이다. 돈은 필요 없고 소리만 들어주면 어디든지 찾아가겠다는 소리꾼도 그렇고 무대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 후배들도 천생 광대다. 단순한 웃음과 뒤돌아서면 잊히고 마는 인스턴트 웃음의 시대, 대중에게 인기 없어 돈 버는 광대다. 사지 멀쩡해도 각설이 타령으로 밥 빌어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들처럼 이들의 몸에 밴 웃음과 슬픔과 가난의 유전자는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과 몸짓과 표정을 통해 감동하려 하지 않는다. 바쁜 일상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다른 이의 말과 몸짓과 표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스꽝스럽게 보이려 애쓰는 나날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광대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짧은 치마와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현란한 춤을 추며 노래하는 아이돌처럼 자본이 요구하는 우스꽝스러움을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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