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한나 윌키, 늙고 병든 몸으로 오해를 불식시키다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한나 윌키, 늙고 병든 몸으로 오해를 불식시키다
  • 충청매일
  • 승인 2020.06.0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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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질병과 늙음 (3) 한나 윌키의 자화상들
1세대 페미니스트 미술가 한나 윌키의 1974년 작품 ‘S.O.S’
씹던 껌으로 여성의 성기 형태 만들어 이마·볼·턱에 부착
여성성 적극적으로 드러내 자기 작품의 중요한 매체로 사용
또다른 작품에선 유방암 걸린 엄마와 자신의 암 투병과정 남겨
‘인트라-비너스’ 암 투병 흔적 남은 몸을 비너스 상징으로 사용
늙어 주름지고 병들어 한없이 초라해진 신체 당당하게 묘사
왼쪽부터 한나 윌키 ‘S.O.S(Starification Object Series)’ 1974, 한나 윌키 ‘예술가와 그녀의 어머니 셀마 버터의 초상’ 1978, 한나 윌키 ‘인트라-비너스’ 연작 중 1992.
왼쪽부터 한나 윌키 ‘S.O.S(Starification Object Series)’ 1974, 한나 윌키 ‘예술가와 그녀의 어머니 셀마 버터의 초상’ 1978, 한나 윌키 ‘인트라-비너스’ 연작 중 1992.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한나 윌키(Hannah Wilke)는 서구 미술계에서 페미니즘이 화두로 떠오르던 1974년 ‘S.O.S’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행하고 그 과정에서 자화상 사진들을 찍었다. ‘S.O.S’라는 제목은 ‘Starification Object Series’, 즉 ‘스타만들기 오브제 연작’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들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축약어이다. 반라 혹은 전라로 마치 패션모델처럼 포즈를 취하고 카메라를 응시하거나 유혹하는 듯한 한나 윌키의 자화상들은 예기치 않은 논란에 휩싸였다.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를 지나치게 드러내고자 하는 노출증의 발로이거나 나르시시즘의 소산인 것 아닌가 하는 비평계의 혹평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의도와는 다른 의심을 살 만큼 한나 윌키는 배우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매끈한 몸매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자신의 신체를 도구로 삼은 만큼 이러한 의심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실로 첫눈에 그의 자화상 사진들은 아름다운 얼굴이나 몸매에 먼저 눈길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외모를 감상하는데 방해를 하는 조그만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마와 볼, 그리고 턱에 붙은 조그만 돌기 같은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추잉껌(chewing gum)으로 만든 사물들이다. 그녀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이들에게 껌을 나누어주고 스스로도 껌을 씹어서 관객으로부터 씹던 것을 받고 스스로도 씹다 뱉은 그것으로 어떤 형태를 만들어 자신의 신체에 붙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형태는 자세히 보면 여성 성기의 형태이다.

페미니즘의 1세대라 불리는 시기, 그러니까 1970년대는 그간 미술의 역사 속에서 그토록 많은 여성의 누드를 그려지면서도 다리를 교차시켜 교묘히 숨겨오던 여성 성기가 작품 속에 빈출하는 때이기도 하다.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면서도 성기의 모양은 물론이고 음모마저도 교묘히 숨겨오던 미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여성 작가들은, 여성의 성기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한나 윌키가 씹던 껌으로 여성의 성기 형태를 만들어 자신의 신체에 부착하는 행위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여성은 자신의 성기를 잘 가리도록 교육받아, 치마를 입든 바지를 입든 다리를 곱게 모아 가운데 부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자세가 여성다운 것이라고 믿게 되고, 이러한 교육은 오늘날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고대의 조각상에서부터 여성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모은 모습으로 조각되거나, 누드 조각상에서조차 자신의 손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가리는 모습이 더욱 교묘하게 에로티시즘을 부추기는 요소로 활용되었고, 이 자세는 ‘정숙한’ 자세로 불리워졌다. 전통적인 미술작품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이 관음증적 시선의 소산이라고 비판적 시각을 가졌던 1세대 페미니즘 미술가들이 그간 필사적으로 감추어져왔던 여성의 성기를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여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 윌키의 그러한 시도는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페미니즘 미술비평계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윌키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여성 성기의 ‘있음’이고 그것이 여성의 모습을 감상하는데 방해적 요소로 작동시키고자 했던 것임에도 말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남근 선망(penis envy)’은 남성은 있고 여성은 없기에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부러워한다는 이론이지만, 한나 윌키의 작품은 여성에게는 여성의 성기가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로틱한 여성의 재현 구도를 그대로 따라하면서도, 거기에 빠져 있던 여성의 성기를 얼굴과 몸 전체에 붙여서 관음증적 시선을 공격하고자 했던 한나 윌키의 의도가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오해를 불러 일으켰던 것은 그녀의 이후 작품들을 통해 서서히 불식된다.

몇 년 후 한나 윌키는 ‘예술가와 그녀 어머니 셀마 버터의 초상’에서 유방암으로 가슴을 절제한 어머니와의 이인 초상을 제작했다. 여러 비판적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나 윌키는 자신의 신체를 다시 드러냈고, 한쪽 가슴을 절제하고 흉측한 상처가 남은 어머니의 늙은 신체와 병치되면서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의 신체는 투병과정을 고스란히 증언하듯 가슴으로부터 겨드랑이까지 붉은 상처가 흉터가 되어 남아 있는 반면, 한나 윌키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자신의 상반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의도가 ‘늙고 병든 여성’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대결로 보이는가? 한나 윌키는 자신과 꼭 닮은 어머니의 늙고 병든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어쩌면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젊고 아름다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 것이다. 한나 윌키는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어머니의 인생을 통해 늙고 병들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그것이 여성 인간의 실제 모습이 아닌가, 하고 묻고 있는 듯하다.

한나 윌키의 이러한 예감이 적중이라도 하듯이, 그녀는 임파선암에 걸려 수년간 투병하다가 54세의 나이로 이른 죽음을 맞는다. 놀라운 것은, 암투병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몸을 예술 매체로 삼아 신체가 변형되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점이다. ‘인트라-비너스’ 연작은 한나 윌키 자신의 신체가 질병에 의해 급속히 무너지는 과정,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가 빠지고 온 몸이 부으며 운신을 할 수 없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화장실까지 갈 수 없어 병실 안에 환자용 변기를 두고 용변을 보는 모습, 고통을 가누기 위해 이불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 여기저기에 수술 자국이 남겨진 전신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기고 있다.

‘인트라-비너스’라는 제목은 ‘비너스 내부’라는 의미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성 비너스의 내부는 바로 이러하다는 선언적인 제목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마음대로 에로틱하게 상상되고 소비되는 신체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나 자신의 모습과 나 자신의 일생의 장면들을 그녀는 놓치지 않고 기록해 나갔다. 어쩌면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여성의 모습, 늙어 주름지고 병들어 초라해진 신체를 그녀는 당당하게 작품으로 드러냈다.

여성의 신체를 향한 관음증을 문제 삼았던 젊은 날의 작품들은 후기의 작품들을 통해 그 의미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삼았던 일생 동안의 작품들을 통해 묻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무엇이고,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여성의 늙어감과 여성이 안고 가는 질병의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의 작품은 이제 여성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한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성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점을 이토록 극적으로 보여주며 한나 윌키의 작품들은 묵직한 질문들을 남겼다.

한때 그녀의 것이었던 아름다운 육체는 남김없이 사라졌다. 자신의 아름다운 신체를 보여줌으로써 나르시시즘에 빠진 노출증 환자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후기의 작품들을 통해 남김없이 사라졌다. 한나 윌키가 남긴 일생의 자화상 사진들은 여성 신체에 덧씌워지는 전통적인 ‘관념들’, 여성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관념들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그 맞서는 방법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뿐이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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