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관음증의 대상이 된 소녀와 개성을 표출하는 소녀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관음증의 대상이 된 소녀와 개성을 표출하는 소녀
  • 충청매일
  • 승인 2020.05.10 1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8장 소녀: 소아성애의 정당화와 그에 맞서기
(4) 발튀스의 소녀와 매리 카삿의 소녀
발튀스 ‘황금시대’는 작가 개인의 성애적 관점 반전돼 있어
발튀스 작품과 대조되는 매리 카삿 ‘파란 의자에 앉은 소녀’
소파 깊숙이 몸을 누이고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 묘사
통통한 볼과 불만스럽게 꼭 다문 입매, 생동감 있는 모습 눈길
두 작품 속 아이 서로 다른 관점서 그려…작가 의도 살펴야
왼쪽부터 발튀스 ‘황금시대’ 1945, 매리 카삿 ‘파란 의자에 앉은 소녀’ 1878.
왼쪽부터 발튀스 ‘황금시대’ 1945, 매리 카삿 ‘파란 의자에 앉은 소녀’ 1878.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미술작품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어쩌면 너무 거친 시도일 수도 있다. 모더니즘의 도래 이후 미술은 지속적으로 경계를 파괴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몰두해왔다. 기존 미술의 전통과 장르, 기법을 뛰어넘어 작품에서 안전하게 기대할 수 있었던 문법을 깨고, 그로부터 또 다른 통찰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지난 백여 년 간 미술이 해 왔던 일이다. 때문에 어떠한 작품이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감상법일 수 있다. 특정한 작품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미술가의 노림수일 수 있을 것이므로, 감상자는 그 불편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인지 숙고하는 방식으로 현대미술은 전개되어 왔다.

미술은 인간의 일이다. 에로티시즘 역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과 충동이므로 현대에 와서는 이전 시대와 달리 대단히 솔직하고 대담한 방식으로 미술작품의 주제가 되어 왔다. 이전 시대에는 저급하다고 백안시되었을 법한 에로틱한 소재들이 날것으로 작품에 등장해도 이제는 더 이상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으며, 기존의 전통과 사회제도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작품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소아성애를 노골화한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바라보며 심리학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성애감정이 있고 없음을 분석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러한 ‘불편한’ 작품들이 어린이들의 에로티시즘을 그린 것이 아니라 어린이를 향한 성인들의 에로틱한 감정을 통해 실제의 어린이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이전에 소개한 바 있는 발튀스의 ‘황금시대’를 이러한 관점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긴 의자에 걸쳐 누워있는 여자아이와 상반신을 벗은 남성이 보이는 이 작품에서 왜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그러한 감상은 지나친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갖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본다. 이 작품은 상징적 장치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그려진 것들만으로 별달리 흠잡을 요소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아이의 연령대는 어느 정도 되었을까. 아홉 살, 아니면 열 살쯤, 아직 이차 성징이 드러나지 않은 어린 모습이다. 아이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상의가 한쪽으로 흘러내려 어깨와 가슴 부위가 드러나고 있으며, 한쪽 다리를 올려 치마 아래의 마른 맨다리가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다.

발튀스의 다른 소녀 그림들처럼 성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거나 혹은 팬티가 보이는 모습은 아니지만, 각도를 돌려 아이의 다리 쪽으로 위치를 옮겨가면 얼마든지 치마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모습은 저 나이 때 아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가 들고 있는 거울은 이 작품에서 여러 역할을 담당한다. 여성이 들고 있는 거울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미모에 빠져 다가올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상징해 왔다. 이 아이 역시 엄마에게서 빌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걸이를 하고 한쪽 상의를 내려 자신의 얼굴과 몸을 들여다보며 주변의 환경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발튀스는 도덕적 경계선을 교묘히 넘으면서도 거울이라는 전통적인 상징을 사용하여 에로틱한 요소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벽난로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그 안으로 나무를 집어넣고 있는 상반신 탈의의 남성은 거의 난로 안으로 들어갈 기세이다. 발튀스는 프로이트적인 상징들을 잘 알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억압된 성적 욕망이 꿈에서 드러날 때 동굴 같은 검은 구멍의 형상들은 여성의 상징으로, 딱딱한 나무와 같은 길죽한 것들은 남성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활활 타오르는 검은 구멍인 벽난로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남성, 그리고 그 앞에 묘한 미소와 함께 거울을 바라보며 신체를 드러내고 있는 여자 아이는 너무 쉬운 상징인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아이의 감추어진 성욕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가? 성적 호기심이 있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성인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이러한 종류의 그림을 수도 없이 그려왔던 남성 화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이 작품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발튀스는 자신이 소아성애자가 아니라고 지속적으로 밝혀왔지만 어린 소녀들을 성애의 관점을 바라보고 그려왔던 것은 부인될 수 없다. 이 그림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그림 속 아이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같은 방식으로 화가의 성애적 관점이 반전(反轉)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을 바라보며 감추어진 욕망을 일깨우게 될 이들은 어린아이도 성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린 작가와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이의 욕망에 관한 것처럼 그려져 있음으로 해서,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도덕적 문제 상황에 봉착하지 않는 것이다.

소파에 길게 드러누운 또 다른 아이를 비교해 봄으로써 발튀스의 관점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보자. 매리 카삿(Mary Cassette)의 ‘파란 의자에 앉은 소녀’는 발튀스의 소녀처럼 방심하고 소파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다리를 벌려 소파 아래로 내리고 한쪽 팔을 들어 머리를 괴고 있으며 다른 쪽 팔은 소파의 팔걸이에 걸치고 있다. 치마는 들어 올려져 있으며 발이 땅에 닿지 않아 잘못하면 소파 아래로 흘러내려 떨어져 버릴 것만 같다.

아이의 표정은 미소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바라보고 있지 않지만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고, 통통한 볼과 불만스럽게 꼭 다문 입매가 아이의 생동감 있는 개성을 형성하고 있다. 발튀스의 소녀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가장된,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소녀라면 매리 카삿의 소녀는 개성이 드러난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팔다리를 드러내고 흘러내리듯 앉아서 치마가 올라간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소녀는 관객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대상이 아니다.

매리 카삿의 아이는 그림의 모델을 서고 있는 동안 지루함을 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에는 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가 지겨워져서 화가가 자신을 그리거나 말거나 언제 끝나나 기다리면서 나가 놀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옆 소파에 누워있는 강아지조차도 이 지루함을 깨고 아이와 함께 뛰어놀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카삿은 미국 여성이지만 프랑스로 가서 드가 등의 인상주의자들과 더불어 작품활동을 했고, 인상파 화가들을 미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컬렉션을 주선하는 등의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대개의 여성화가들이 그렇듯 그룹의 주류에 속하지는 못했고, 결정적으로 태양빛 아래에서의 야외 풍경에 역점을 두었던 인상파 작가들과는 달리 가정 내에서의 실내 풍경을 주로 그렸기 때문에 ‘여성적 소재’에 몰두했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800년대 후반 당시 여성들의 삶의 반경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시대적 한계이자, 더불어 이 여성화가의 또 다른 소재 개발의 계기가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실내에서의 아이와 강아지는 매리 카삿이 쉽게 모델로 섭외할 수 있고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소재였을 것이다.

발튀스의 소녀와 카삿의 소녀, 두 아이들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그려져 있다. 한 아이는 관음증의 대상으로, 다른 아이는 아이다운 개성을 표출하는 주체로 말이다. 이러한 대비가 남성 화가와 여성 화가의 차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이분법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다만 어린 소녀를 그린 어떤 그림이 미술사적 역작으로 남겨지고 지속적으로 관객들의 감상의 대상이 될 때, 그리고 어떤 불편함이 감지될 때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작품의 의도를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시도가 아닐까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