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4월이면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언덕은 복사꽃으로 환했다. 현재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머지않아 입주가 시작되면 다른 세상으로 변할 것이다. 상전벽해란 말이 실감 난다. 몇 해 전부터 청주는 아파트 건설 붐이 일고 있다. 청주와 청원이 통합되고 거대 도시가 되면서일까. 인구의 증가 폭보다 아파트 증가 폭이 확연히 크다. 도시의 외연이 커지면서 풍경도 변하고 있다.

내수에서 오창, 금천동을 거쳐 용암동으로 이사한 지도 10년이 넘었다. 당시 청주에는 아파트 매매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매매가 아니면 임대나 전세를 구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는 가진 것 없는 자에게 기꺼이 대출해주었고 8할이 은행 지분인 아파트를 구입하고 생애 첫 부동산 소유주가 되었다. 아파트값은 수직 상승으로 올랐다. 손에 쥘 수 없는 돈이지만, 부자가 된 기분이랄까. 그러나 헌 집을 팔아도 새집으로 이사 갈 수는 없는 돈이었다. 집을 투기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 나로서는 불편하기만 했다. 부동산 전문가(투기)가 펼친 작전에 청주시민만 피해 보는 형국이다.

부실 공사인지 베란다에 습기가 차서 곰팡이가 왕성히 번식하고 있다.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곰팡이 세상이 될 것 같았다. 관리실에서 몇 번 다녀갔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집집이 자가용이 2대 이상 있으니 주차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얼굴 맞대고 서로의 안부도 묻지 않는 주민들의 세상, 시골 마을 몇 개를 합친 수보다 많은 사람이 사는 거대 마을 아파트촌은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층간 소음과 담배 연기 민원이 수시로 방송된다. 엘리베이터는 침묵과 경계의 눈초리를 싣고 가는 호송차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며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몸이 먼저 밖을 향하는 곳이다. 아파트는 비인간적 공간이다.

그래도 이사를 해야 한다. 세련된 공간구조와 넓은 지하 주차장과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춘 새 아파트로 옮겨야 한다. 정주민의 삶을 박탈당한 현대인의 숙명처럼 몇 집이 이사를 했다. 새벽부터 이동 주차를 요구하는 전화에 눈을 뜨고 사다리에 실려 내려오는 짐들을 바라본다. 낡고 오래된 삶이 새집으로 떠나는 풍경이다. 저렇게 많은 아파트에는 어디에서 사람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까 궁금했었다.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지에서 거처를 옮기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사 오는 이 없이 떠나는 이만 있는 풍경처럼.

본의 아니게 두 번의 분양권을 양도했다. 그간 계약을 위해 오간 품삯도 되지 않는 일을 두 번이나 겪고 나니 이제는 정주의 꿈을 꿔야 하겠다. 시세보다 싼 가격에도 헌 집은 매매되지 않는다.

홀로 되신 아버지의 집은 초가에서 기와로, 기와에서 현대 건축물로 변하였지만, 내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기억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곳이다. 마을이 수몰되면서 대부분 떠났지만, 지대가 높은 몇몇 집은 남았다. 떠돌이의 지친 몸을 이끌고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품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미안하지만, 나의 아들에게는 품을 줄 공간이 없다. 할아버지의 품을 나눠주는 일도 영원하지 않을 터이니, 고지서만 쌓여가는 콘크리트 사각에서 벗어나 떠돌이 삶을 끝내는 꿈을 꿔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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