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말 중에 ‘오누이’라는 단어만큼 아름다운 말이 또 있을까. 오라비와 누이를 함께 일컫는 말. 우리 집에는 꼬맹이 오누이가 있다. 여느 동기 간처럼 투탁 거리고 싸우기도, 재잘재잘 떠들기도 잘하는 오누이다.

고슴도치 엄마인 내 눈에는 사이가 좋아 보이는 착한 오누이다.

우리 집 오누이 사이가 더욱 각별하고 가까운 이유를 굳이 찾자면, 집 밖을 나가도 쉽게 친구를 만날 수 없는 세상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학원 가야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대인 게 서글펐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힘든 시절이라 더 서글프다. 게다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긴긴 방학이라니. 집 밖을 마음 놓고 나갈 수 없으니 오라비에게는 누이가, 누이에게는 오라비가 최고의 친구이자 단짝일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인 것 같다. 오누이가 어딘가 변하고 있었다.

‘츤데레(겉으론 무심한 듯 행동하지만 은근히 챙겨주는 사람을 칭하는 말)’의 대명사인 것 같이 행동하던 오라비가 대놓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종종 눈에 띄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라비에게 징징거리는 누이가 돼 버렸다. 물론 평소엔 무슨 일이든 야무지게 척척 잘 해내는 동생이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코로나19의 발생과 그로 인해 하루 종일 둘이서만 있어야 하는 집콕, 그와 더불어 늦은 시간에나 볼 수 있는 아빠 얼굴과 그나마도 볼 수 없는 엄마 얼굴. (엄마·아빠는 둘 다 청주시 공무원이다.)

오누이에게는 가혹하고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냉장고의 간식을 꺼내 먹는 것도, 한 끼 챙겨 먹는 일도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어스름한 새벽에, 깜깜한 밤에 잠든 오누이의 모습을 보기만 하는 엄마로서는 이러한 오누이의 변화가 웃프기만 하다.

잠든 아이의 손을 보니 통통하니 살이 올라 있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문제집을 펼쳐보니 연필로 썼다, 지우개로 지웠다, 다시 연필로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시기에 별 투덜거림 없이, 말썽 없이 잘 살아남아 주는 아이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코로나19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많은 변화를 만드는 코로나19인 듯하다. 물론 이제는 코로나19로 인한 힘듦, 많은 생각, 변화를 그만하고 싶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