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어김없이 꽃이 피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꽃은 피고 봄이 찾아왔다. 코로나 19로 지구의 지배자 인간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와중에도 꽃은 보도블록 작은 틈을 비집고 피어난다. 고층 빌딩 공사장 공터에도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복개천 아래에도 꽃이 피었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는 꽃이 달갑지만은 않다. 해맑게 웃고 있는 개나리도 화사한 자태를 뽐내는 벚꽃도 서운하긴 마찬가지다. 단 한번 화려한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이에게 세간의 관심은 남의 일이다. 주목받는 사람이기보다는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평범하게 살기를 원한다. 주목받으며 화려하게 사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들의 권력과 재력이 샘나기도 하지만, 그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

요즘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는 화려한 벚꽃보다 소박하게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스스로 이름을 갖지 못한 풀꽃들, 사람들로부터 명명된 풀꽃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잊힌 풀꽃들이 애잔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꽃다지, 별꽃, 현호색, 양지꽃 이름도 어여쁜 꽃들에게 고개 숙여 눈 맞춰주는 이 몇이나 있을까. 가던 길 멈추고 손길 내미는 이 몇이나 있을까. 꽃대궁 삐죽 올려 바람에 나부끼는 냉이꽃을 한참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휘청하며 쓰러질 것 같은 냉이꽃도 꽃 진 자리마다 씨앗을 키울 것이다. 밥도 돈도 되지 않는 냉이꽃, 씨앗을 중하게 여기는 이 없어도 혹여, 무심한 발길에 밟혀 쓰러지더라도 냉이꽃은 피어나고 기어이 열매를 맺는다. 세상 관심 밖에 피어난 작은 냉이꽃을 보며 힘겹게 견디고 있는 예술가가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예술가의 길이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길들여진 삶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천변의 벚나무보다 무질서하게 피어나는 산벚나무를 꿈꾸기 때문이다. 화단에 심긴 꽃이 아닌 지천으로 피어나는 들풀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진리는 아주 작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우리의 신념을 몰라주더라도 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기다릴 줄 아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 19는 많은 이의 생계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복잡한 자본구조는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하나만 정지해도 피해가 산더미처럼 커진다. 학교 개학이 연기되자 주변 상권이 마비되고 급식이 중단되자 식자재 납품업체뿐 아니라 농부는 애써 키운 농산물을 갈아엎어야 하는 지경이다. 학교예술강사들도 일자리를 잃고 공연마저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 19 사태가 하루빨리 종식되지 않으면, 예술가 부도의 날이 도래하고 말 것이다. 애당초 주목받지 못하는 예술가들이라 특별한 기대는 없었지만, 자본주의 하층민 예술가의 길이 생각보다 험난함이 느껴진다.

어영부영 4월이 가고 있다.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고 연습실 월세가 밀렸다. 단원 몇몇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몇은 공장에 취직했다. 자본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예술가의 삶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도태(淘汰)된 자리에 값싼 모조품으로 대체하는 자본의 논리 앞에 예술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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