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청주 시민들은 상당산성을 그냥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친근한 시민의 안식처이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적지라기보다 심신을 다지고 친목을 돈독하게 하는 든든한 배후이다. 은퇴 이후에 상당산성에 갈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든든한 꿈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청주 사람들은 ‘산성에 갔다가 친구들하고 막걸리 한잔 했어’라고 은근히 자랑한다.

나는 대개 산성에 혼자 간다. 시간 나는 대로 주성동 백화산 쪽으로 올라가서 상당산성 미호문( 弭虎門)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하고, 때로 공남문(控南門)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때로는 산성을 일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되짚어 내려온다. 서너 시간 걸리므로 하루 운동량은 충분하다. 그게 전부이다. 그런 날은 상당산성이 내게도 그냥 ‘산성’이고, 나는 긍지를 지닌 청주 사람이다.

오늘은 답사란 이름으로 상당산성에 간다. 어떤 사람은 상당산성은 조선 숙종대에 쌓은 것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고구려가 청주를 점령하여 쌓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백제가 쌓았다 하고, 신라가 손을 댔다고도 한다. 승장 영휴(英休)가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궁예는 상당산성을 쌓고 견훤은 정북동토성을 쌓아 맞서 싸웠다고 한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정북동토성과 상당산성에서 대치했을 수는 있어도 산성을 쌓았다고 하기에는 그들이 청주에서 머문 기간이 너무 짧다. 그러나 다 맞는 말이라고 하자. 그 만큼 상당산성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청주는 삼국 힘겨루기의 각축장이었다. 청주는 삼국 세력의 굴곡에 따라 주인이 바뀌었다. 세력이 흥하면 상당산성을 차지했다가 다시 세력이 약해지면 빼앗기던 산성이다. 그래서 또한 상당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시대 ‘상당현(上黨縣)’으로 불렸던 것으로부터 연유된다. 조선 영조 40년 (1764년) 충청병사 이태상이 그려 올린 상당산성도를 토대로 살펴보면 상당산 정상부에 상당산성 치소가 있었다고 하고 최근에 이를 발굴 조사하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 치소가 있었다고 상당현 치소가 상당산성에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치소가 있었기에 정상부를 상당산이라 했을 것이다.

백제가 최초로 상당현이란 이름을 사용했다면 이곳에 처음 성을 지은 것은 백제라고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기록에 ‘상당의 성터에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란 말이 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 숙종 때 고쳐 쌓은 것이지 처음 쌓은 것은 아니다. 공남문 근처에 보면 지금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토성의 흔적이 있다고 기록된 문헌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많은 산성답사를 한 내 나름의 짐작이다. 또 토축산성의 귀재인 백제가 토축한 것을 조선 숙종 때 석축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토축 당시의 판축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해서 토성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신을 보지 못했다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과 비슷한 논리의 오류이다.

신라는 잠시 차지했을 때 수리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고구려 군사가 낭비성까지 내려왔는데 신라의 김용춘 장군이 김유신과 함께 5천명을 목 베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가 쌓았다고 하는 것도 억측이다. 그 일은 부연리 낭비성인지 상당산성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상당산성을 중심으로 한 낭비성, 노고성, 구라성인 것을 그냥 낭비성이라 표현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