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모성: 강요된 이념
(3) 신사임당과 나혜석
16세기 현모양처 상징 신사임당 대단한 화가로 알려져
조선 전기 문필가 어숙권은 안견 다음가는 화가로 칭송
산수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보수적인 유교상황 속
그림으로 평가되기 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부각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나혜석’
화가이자 문필가로서 여성이 쟁취해야 할 권리 대변
여성의 정절만 문제시되는 부당함 알리는 글 발표도

왼쪽부터 한국은행이 발표한 오만원권, 2009, 신사임당 ‘초충도(8폭중)’ 16세기 초,  나혜석 자화상 1928경.
왼쪽부터 한국은행이 발표한 오만원권, 2009, 신사임당 ‘초충도(8폭중)’ 16세기 초, 나혜석 자화상 1928경.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2009년 오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의 얼굴과 작품이 확정됐다. 천원권 퇴계 이황, 오천원권 율곡 이이, 만원권 세종대왕으로 조선시대의 남성들로만 점철되어 있던 우리나라의 화폐에 여성인 신사임당의 모습과 작품이 올라가게 됐다는 것은 대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의외로 확정 당시 여성계는 이 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 이유는 한국은행이 발표한 선정 이유에 있었다.

한국은행측은 신사임당을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어진 아내의 소임을 다하고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준 인물”로 소개했으며,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예술가이기는 예술가이되 ‘여류’ 예술가이고, ‘어진 아내’이자 심지어 ‘영재교육’에 성과를 보여준 인물로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는 결정 사유는 2009년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장려되는 가치관 치고는 너무 고루하지 않은가 말이다. 세 사람의 훌륭한 학문적 정치적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 남성들을 기리는 화폐에 이어 신사임당이 선정되어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그녀의 일생이 보여주었던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길을 따르라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수세기에 걸쳐 왜곡되어 왔음을 밝혀내고 있다. 신사임당은 주로 초충도(草蟲圖), 즉 식물과 곤충의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임당이 생존했던 당대에는 그녀가 그린 산수도(山水圖)가 극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들 율곡의 글 ‘선비행장’에는 신사임당이 산수화를 그렸고, 포도를 그려 세상에 견줄 한만 이가 없었고, 그녀가 그린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았던 율곡은 오늘날 신사임당하면 초충도를 바로 떠올리게 되는 것과는 반대로 산수화와 포도 그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신사임당과 당대를 함께 했던 저명한 남성 문필가들 역시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대한 발문을 써 그림을 예찬하였으며, 사임당은 ‘화가 신씨’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현모양처의 상징으로서의 신사임당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자로 말이다. 이이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 전기의 문필가 어숙권은 그녀를 안견 다음가는 화가로 칭송하고 있는 바, 16세기의 신사임당은 율곡의 어머니로서 훌륭한 것은 차치하고 대단한 화가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의 그림이라는 것은 시서화가 함께 하는 문인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말한 것도 없다.

그랬던 신사임당이 유교의 기틀을 탄탄하게 다지던 17세기에는 ‘어머니’로서의 훌륭함이 화가로서의 행적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평가의 변화에는 송시열과 그 뜻을 같이 하는 문장가들, 그리고 그 제자들이 신사임당의 산수화를 평가절하하는 과정이 있었다. 물론 장난삼아 그린 것 같지는 않게 훌륭하지만 남녀가 유별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훌륭한 문인들의 그림과 견주어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사임당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고, 그녀의 이러한 훌륭한 그림들은 율곡이라는 걸출한 대학자이자 정치가를 낳은 어머니이기에 훌륭한 것이라는 식의 글들이 그녀의 그림에 붙기 시작한 것이다.

서양에서 그림의 위계가 있어, 정물화보다는 초상화를, 초상화보다는 역사화, 종교화를 위대한 그림의 영역으로 칭송하는 것과 같이, 동양에서도 눈앞에 있는 작은 것들을 그리는 것보다 자연의 기운을 담아내는 산수도가 다른 영역들보다 더 도전하기 어렵고 그 신묘한 경지에 도달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살아생전 산수도로 높이 평가받던 신사임당은 17세기 보수적인 유교적 상황에서 그림으로 평가되기 보다는 율곡을 낳아 양육한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부각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왜곡되기 시작한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오늘날까지, 그림도 그렸지만 좋은 태교를 통해 율곡 이이를 낳고 무려 ‘영재교육’에 힘쓰고 가정을 지켰던 여성으로, 그러니까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평가되게 이르렀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훌륭한 어머니상 신사임당의 저 반대편에 있는 나쁜 어머니는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누가 뭐래도 나혜석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화를 배웠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이다. 나혜석은 화가일 뿐 아니라 문필가로 더 빛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유교적 세계관이 새로운 근대적 세계관과 충돌을 일으키던 시기, 여성으로 태어나 부모의 뜻에 따라 조혼을 하지 않고 유학시기에도 혼인을 강요하는 부모의 뜻에 반대하여 우리나라의 조혼 풍습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일생 동안 당대의 여성이 핍박받는 상황과 여성이 쟁취해야 하는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시기, ‘학지광’에 발표했던 ‘이상적 부인’에는 “남자는 부(父)요 부(夫)라. 양부현부(良父賢夫)에 대한 교육법은 아직도 듣지 못하였으니 다만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된 교육주의라. 정신수양상으로 언(言)하더라도 실로 재미없는 말이다. 또한 부인의 온양유순(溫養柔順)으로만 이상이라 함도 필취(必取)할 바가 아닌가 하노니, 운(云)하면 여자를 노예 만들기 위하여 차(此) 주의로 부덕의 장려가 필요하였었도다”라고 썼다. 현모양처에 대한 가르침은 있는데, 현부양부에 대한 이념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이는 필시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사회적 계략이라는 것이다. 유학 이후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발표했던 소설 ‘경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경희도 사람일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일다. 또 조선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나혜석은 당대의 현모양처 이념이 여성을 억압하는 기재이며, 여성도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그녀가 당시에 훌륭한 여성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혜석은 결혼 이후 다른 남성과의 불륜 사건에 휘말리며 이혼을 당하게 되었고, 만천하에 이혼의 심경과 여성의 정절만 문제시되는 부당함을 알리는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그 이후 대단히 신산한 삶을 살아가다가 무연고자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나혜석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녀는 첫째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겪은 심경의 변화를 ‘모(母)된 감상기’에 남겼다. 이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자식들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는 표현이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요동치면서, 자식의 어머니가 되는 불가사의한 기쁨에 휩싸이게 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활동을 제약하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불안을 가감없이 표현하면서 모성애라는 것이 생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세인들은 향용, 모친의 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모된 자 마음 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 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혹 있다 하면 제2차부터 모 될 때야 있을 수 있다. 즉 경험과 시간을 경하여야만 있는 듯싶다”라고 말하며, 처음부터 여성의 마음에 모성애가 선천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사같은 웃음을 보이는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점점 커가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나혜석은 이러한 과정을 모든 여성들이 겪을 것이라 짐작했고, 다른 여성들이 공감의 지원을 해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혼 후 아이들의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집에 찾아가 애원했지만 전남편은 경찰을 동원해 차갑게 내쫓았다. 남다른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나혜석의 모성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이 시대에도 과격하게 느껴지니 당시로서는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 없었으리라. 그녀는 이후 ‘삼천리’에 기고한 글에서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그래서 좋은 어머니는 어떤 어머니인가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화가 신씨로 일컬어졌지만 시대를 거쳐 현모양처의 이미지만 남은 신사임당, 화가이자 문필가로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솔직하다 못해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체험을 글로 남긴 나혜석. 그녀들은 모두 아이들을 사랑한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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