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런 남의 목숨 줄을 강제로 빼앗았으니 동티가 나지 않을 수 없지!”

김개동은 저하고는 전혀 상관없다는 투였다.

김개동도 그렇게 남 이야기하듯 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 역시 형방질을 하며 고을민들을 겁박하여 아귀처럼 뜯어먹고 있었다. 형방이란 자가 고을민들 사이에 일어난 시시비비를 가려 문제 해결을 도와주거나, 송사가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화해시켜 분란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그의 할 일이었다. 그런대도 김개동은 오히려 고을민들 간의 싸움을 조장하고 부추켰다. 이웃 간에 얼굴을 맞대고 살다보면 사소한 일로 인해 다툼이 벌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일테면 아무것도 아닌 말실수를 하여 싸움이 날 때도 있고,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질 때도 있고, 농군들이라면 농사를 짓다 논둑, 밭둑 싸움도 일어나고, 물꼬싸움도 일어나고 일상이 갈등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일로 이웃 간에 주먹다짐이 일어나거나 낯을 붉히며 의절을 할 그런 일은 아니었다. 잠시 말을 섞지 않는다거나 고샅에서 만나면 외면하며 지나가거나 하며 며칠 지나다보면 언제 그랬냐 싶게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말을 나누게 되는 그런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김개동이는 자신이 형방임내 내세워 아이들 싸움을 어른 싸움 만들고, 물꼬 싸움을 부추겨 논둑 싸움 만들고, 종당에는 관아로 불러들여 잘잘못을 물어볼 것도 없이 가둬두고는 빼가려면 벌금을 내라는 식이었다. 가뜩이나 궁핍한 살림에 관아 벌금까지 내야하니 고을민들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사는 것도 줄 타듯 하고 있는 지경이지만 당장 식구가 관아에 잡혀갔으니 부잣집 장리라도 얻어다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죽어나는 것은 고을촌민들이었다. 김개동이는 저도 고을민들을 착취하면서 김주태가 하는 일에는 남의 다리 긁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했길래 동티가 났단 말인가요?”

최풍원이 물었다.

“양안에 없는 청풍관내 땅을 부사영감에게 뒷돈을 주고 빼앗은 거지.”

“양안에 없는 땅이요? 그런 땅도 있단 말인깝쇼?”

“아마 양안에 등록된 땅보다 그렇지 않은 땅이 청풍관내에는 더 많을 걸세.”

김개동의 말처럼 양안에 올라있지 않은 땅이 더 많을 지도 몰랐다. 대를 이어 청풍관아에서 아전질을 해오고 있으니 그의 말이 정확할 터였다. 하기야 남의 땅을 부쳐먹고 사는 고을민들 같은 경우에는 그 땅이 양안에 올라 있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도지를 받고 땅을 빌려주는 부자나 세금을 걷어 들이는 관아 구슬아치라면 제 먹거리를 챙기기 위해 양안을 손금 보듯 환하게 꿰고 있어야 했겠지만, 남의 땅 빌려 농사 짓는 소작농 입장에서는 양안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었다.

양안은 토지 내용을 기록해놓은 일종의 장부였다. 여기에는 전답이 있는 위치, 땅의 질을 따져놓은 등급, 땅의 모양새, 크기, 경계, 땅의 주인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양안의 목적은 세금을 걷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땅 내용을 기록한 것 중 문제가 많은 것은 땅의 면적이었다. 보통 한 두락으로 땅의 면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이 일정치 않아 확실한 면적은 실제로 측량을 하지 않으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말은 지주와 관아 아전이 짜고 두 두락을 한 두락으로 양안에 올려놓고 세금을 떼어먹어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가 아니라 상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어떤 놈이 떼어먹든 어쩌든 그래도 양안에 올라있는 토지에 대한 얼마간의 세금은 관아로 입고되었다.

그런데 청풍관내에는 양안에 올라있지 않은 땅이 등재된 것보다 많을 것이었다. 이런 원인으로는 청풍의 지리적 요인이 가장 컸다. 청풍관내는 대부분 산지였다. 그러다보니 넓은 벌따구니가 있는 고을에 비하면 전답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청풍관내 전으로 말하자면 남한강을 따라 강안과 각 마을마다 흐르는 하천가로 펼쳐진 소잔등 정도였고, 나머지는 높은 준령들 아래 골골마다 비알에 있는 답들이었다. 그런 답들도 농사 짓기 편한 땅이나 기름져 소출이 많은 땅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인이 있고 양안에도 올라 있었다. 그러나 척박한 산비알 뙤기밭이나 나무를 베어내고 일군 거친 땅이나 화전으로 일군 땅들은 누가 주인이랄 것도 없이 이제껏 습관처럼 농사를 지어온 땅이었다. 이런 땅들은 양안에 올라와 있지 않았다.

“김주태는 청풍도가 장사꾼들을 시켜 골골이 개간된 땅과 누가 농사를 짓고 있는지 조사를 해서 사사로이 양안을 만들었다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고을민들을 찾아 다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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