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모성: 강요된 이상
(2)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직시하다
‘헨리 포드 병원’은 자전적인 고통·슬픔 담아낸 작품
프리다가 손에 쥐고 있는 끈은 여섯개의 사물로 연결
자신이 겪은 유산이란 경험 여러가지 상징 통해 구현
‘나의 탄생’은 그녀 어머니가 자신을 출산하는 장면 묘사
출산이란 죽음을 무릅쓰는 경험이라는 메시지 담겨

왼쪽부터 프리다 칼로 ‘헨리 포드 병원’ 1932. 프리다 칼로 ‘나의 탄생’ 1932.
왼쪽부터 프리다 칼로 ‘헨리 포드 병원’ 1932. 프리다 칼로 ‘나의 탄생’ 1932.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행복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 여성의 지극한 행복이라는 계몽주의자들의 말은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겠지만,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면 왜 동시대의 여성들은 아이를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요즘 여성들은 이기적이라서’, ‘편하게 살려고’, 혹은 ‘배운 여자들이 자아실현을 한답시고’ 등의 여러 백안시하는 추측들이 있고, 여기에는 여성으로 태어나 당연히 복무해야 하는 출산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기저에 깔려있다. 인구수가 국력을 좌우하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행위는 고령화 사회를 앞당긴다는 것은 온당한 분석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나 한 번의 생애를 살아가는 여성 개개인에게 있어서 출산이라는 것은 그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일생일대의 사건인 것도 사실이다.

모성이 아이가 주어지는 여성들에게 당연한 본능이고 그 결과로서의 ‘행복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 여성의 책무라면, 왜 여성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기의 어머니가 되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동시대의 여성들은 왜 마다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미술작품에 나타나는 모성(motherhood)을 되돌아보는 내내 되짚어볼 것이다. 그 시작으로 미술작품 속에서 출산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실상 여성의 실존적 경험으로서의 출산이라는 주제는 현대 이전에는 다루어진 바가 없다. 여성의 출산을 실제 지켜보았던 남성 화가들도 굳이 그 사건을 인간의 중대사로 다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아기와 더불어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는 여성들의 모습은 가득한데, 여성이 신체적으로 겪는 고통과 죽음에 가까운 불안의 실체에 대해 말하는 작품들은 거의 없다.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이 되는 일이 출산이라면, 나아가 그것이 사회적인 의무이기도 하다면 왜 화가들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았을까. 미술작품이 지켜야 할 사회적 종교적 가이드라인 때문이라면 그 한계를 교묘히 넘나들며 포르노에 가까운 에로티시즘을 구현한 작품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여성의 시각’으로 출산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클 것 같다. 대개의 화가들이 남성이었으며, 출산은 그들이 직접 겪는 사건이 아니었다. 또한 출산은 비명과 유혈이 난무하는 고통의 현장이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그림으로까지 그릴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 화가들은 자신의 일생 가운데 중요한 사건으로 경험하고 혹은 다른 여성의 경험을 나누며, 출산의 신체적, 심리적 고통의 장면들을 미술작품 안으로 불러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헨리 포드 병원’은 자신의 유산 경험을 그린 작품이다. 프리다 칼로의 일생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잘 알려져 있는 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은 데다 학생 시절 대형 교통사고를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화가로 성공한 여성이다. 멕시코의 위대한 화가로 일컬어지는 디에고 리베라(Diego Libera)와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고, 신체의 고통이 일생 따라다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임신을 원했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던 디에고 리바라가 디트로이트에 있는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사에 초청을 받아 벽화를 그리던 시절 그녀는 임신을 했고, 그 회사의 부속 병원인 헨리 포드 병원에서 유산을 했다.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의 옆면에 ‘Henry Ford Hospital Detroit'라고 쓰여 있는 것은 자신이 유산한 장소를 기록한 것이다.

침대는 황량한 공장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위에 누워있는 것은 프리다 칼로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 중에 스스로 강조하는 특징으로 마치 서로 맞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양 눈썹을 늘 자화상에 그려 넣었다. 프리다 칼로는 그림 속에서 처연한 표정으로 커다란 눈물방울을 흘리고 있으며, 벌거벗은 신체의 하반신 아래에는 피가 흥건하다. 유산을 하고고 아직 부른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데, 그 손에서 막 빠져나가려고 하는 듯이 보이는 혈관 같은 줄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이어주고 있다.

침대의 가운데 위에 떠 있는 것은 사산된 아기이다. 태중에 있는 것 같은 웅크린 모습으로 그려진 아기 왼쪽 옆에는 여성의 하반신의 모형이 있다. 사고로 인해 척추가 불완전했던 그녀의 몸처럼 척추뼈들이 고르지 않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 밖에 고리가 끊어진 것 같은 기계장치, 일부가 시들어 버린 꽃, 그리고 골반 뼈와 검은 달팽이가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 사물들은 아기를 유산한 이후의 복잡한 심리적 경험과 육체적 고통을 비유하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벌거벗은 채 공장 배경의 대지에 홀로 누워있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애도하고, 피를 흘리며 자신의 신체가 겪은 일들을 여러 가지 사물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칼로는 생명을 탄생시키고자 했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죽을 뻔했던 경험이었고 결국 아기를 살리지도 못했다. 많은 여성들이 경험했을 법한 이러한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미술작품 속에 표현한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나의 탄생’도 출산의 장면을 묘사한 충격적인 작품인데, 이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을 출산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의 요소들은 단순하다. 마루에 놓인 침대에 한 여성의 다리 사이로 아기의 머리가 빠져나오고 있다. 그림의 제목이 아니더라도, 아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썹이 맞붙어 있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어 프리다 칼로 자신이 어머니의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기를 낳는 중에 있는 어머니의 상반신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얼굴까지 흰 천으로 덮여 있다. 칼로의 어머니는 출산 중에 사망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프리다 칼로를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잘 길러내었고, 교통사고 이후 오랜 기간 침대생활을 해야만 했던 딸에게 그림을 그릴 것을 권유했던 인물이었다. 칼로의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별도로 제작된 이젤을 마련해주었고, 딸이 생존의 의지를 놓지 않도록 끊임없이 도왔다. 그런데 왜 이 장면에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아기를 낳다가 죽은 산모인 것처럼 그려낸 것일까.

이 장면을 해석하기 위한 또 하나의 단서로 침대 머리에 걸린 그림을 보자. 그림 속에는 성모마리아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입을 벌리고 고통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으며 목에는 두 개의 단검이 그녀의 목을 향해 있다. 프리다 칼로는 ‘나의 탄생’에서 출산이라는 것이 죽음을 무릅 쓰는 경험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성모마리아라는 신적 존재를 출산하는 어머니와 함께 고통 받는 여성으로, 그리고 어머니를 자신을 낳고자 죽음에 가까이 갔던 여성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이니 아이를 낳지 말자는 것이 프리다 칼로의 메시지는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는 경험을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이 그림들은 실제 출산의 경험을 여성의 시각으로 매우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는 의미가 있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이 가진 본능이겠으나, 이를 행복이라는 이념으로 포장하지 않고 실제적인 경험의 경험을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 ‘출산의 신비’가 아니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여성의 실존적 경험으로서의 출산을 그림으로써 말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에로틱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의 누드가 아니라 대개의 여성이 실제로 겪는 사건 속의 누드는 기존의 아름다움의 맥락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오히려 그 모습은 추에 가깝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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