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여부가 있습니까? 석유와 양등도 준비해두었습니다!”

“양등이라면 남포를 말하는 겐가?”

“그렇구먼요.”

“한양 경아전 잔칫집에 가서 본 적이 있지. 대청 추녀 끝에 달아놓았는데 마당이 대낮처럼 훤하더구만!”

“나리도 한 번 써보시지요?”

“관아에도 없는 물건을 내가 써도 될까나?”

“나리가 양등을 쓴다하여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있는가요?”

“그야 그렇지만, 워낙에 귀한 물건이니…….”

김개동이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경아전이 쓰는데 외아전이라고 쓰지 못하란 법 있는가요? 나리가 촌 아전이라 하나 웬만한 한양 아전보다 훨씬 택택할 걸요.”

최풍원의 말처럼 김개동이 비록 시골구석 아전이라 하지만 축적한 재산으로 하면 웬만한 대감 뺨 칠 정도였다. 김개동이가 그 정도로 재산을 모은 것은 아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전은 크게 두 부류로 한양의 관아에 속한 경아전과 지방 관아에 속한 외아전으로 나뉘었다. 경아전은 약간의 급료를 받았지만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외아전에게는 그마저 지급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지방 관아의 아전들은 무보수직으로 급료 자체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전은 때때로 관아에서 쓰는 돈조차 자신의 사비로 충당할 때가 허다했다. 그러다보니 아전들은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전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비리는 세금을 착복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나라에 바쳐야 하는 세금에는 군포와 공납이 있었다.

군포는 군대에 가는 것을 면제해주는 대신 삼베나 무명을, 공납은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법에도 예외는 있었다. 집안에 군대를 가야하는 장정이 있는데, 부모가 연로하거나 병중이어서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거나 여타의 이유로 장정이 없으면 생계유지가 어려울 경우 일 년에 베 두 필을 내면 군역을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아전들은 이러한 제도를 악용했다. 백성들의 급박한 사정을 이용해 두 필을 네 필로 받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아직도 어린아이나 이미 죽은 사람을 또는 군역을 피해 도망간 사람을 군적에 올려놓고 세금을 착복했다. 황구첨정이나 백골징포, 족징·인징 같은 것이 군포 비리의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공납은 본래 그 지방의 특산물로 세금을 내는 제도였다. 특산물은 농업생산물부터 해산물, 과실, 광물, 조수, 집에서 수공업으로 만들어지는 물건까지 팔도에서 백성들이 생산하는 모든 물산들이었다. 이런 물산들은 그 지역의 토지 면적과 가구 수에 따라 정해졌지만 그 기준이 몹시 모호했다. 게다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지방관과 아전들이 담당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많았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온갖 폐단이 난무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방납의 폐단이었다. 방납은 백성이 내야하는 공물을 아전이나 상인이 대신 내주는 대리납부였다. 언뜻 생각하면 백성들을 위해 좋은 방법처럼 생각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런 방납이 생겨나게 된 것은 백성들에게 할당된 품목과 수량을 맞출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농본국가인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산은 전적으로 자연환경에 의존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가뭄과 풍수해였다. 그렇게 되면 아예 소출을 볼 수 없었고 본다고 해도 빈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런데도 백성들에게 공물로 정해져 공안에 한 번 오르면 바꿀 수가 없었다. 설령 백성들이 자기의 생산물을 가지고 와 공납을 한다고 해도 관아 아전들이 물품에 대해 트집을 잡아 퇴짜를 놓고 자신들이 준비해놓은 것을 사서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 이제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산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납을 강요했다. 결국 독촉에 시달리던 백성은 아전이나 상인들에게 공물을 빌리거나 구입하여 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아전이나 상인들이 백성들에게 공물을 대신 납부해주는 대신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심지어는 아전들과 상인들이 서로 짜고 시세보다도 수십 배가 넘는 값에 물건을 팔기도 했다. 이것은 지방관과 아전들이 장사꾼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기고 눈을 감아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김개동이가 재산을 축적한 것도 갖은 명목을 붙여 고을민에게 뜯어낸 세금과 공납을 통해서였다. 여기에는 청풍도가 김주태와 결탁이 있었다. 그러한 밀접한 유착관계는 지금도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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