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러나 돈이 세 쾌에다 귀한 서양물건에 특산물을 수 십 짐이나 가져왔으니 헛말일지라도 단칼에 자르지는 못했다. 저 정도라면 탄호대감으로부터 독촉 받고 있는 곡물도 한꺼번에 해결하고 남음이 있으리라. 이현로는 그것까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선뜻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주변의 많은 눈들을 의식해서였다. 아마도 뒷구멍으로 은밀하게 연통을 넣어 만나게 해달라고 했더라면 최풍원의 등을 두드리며 손이라도 맞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방팔방 눈이 뚫리고 귀가 열린 동헌 앞마당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었다. 비록 청풍현감 이현로가 관아 아전이나 부자들에게 계집 좋아하고 돈 좋아하는 인물로 낙인이 찍혀있다 하나 고을민들에게까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는 고을민들로부터 송덕비라도 하나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은근했다. 최풍원이 이현로의 마음을 몰라 마차로 옮겨도 될 물건들을 수십 명 짐꾼들에게 지게를 지워 동네방네 구경거리를 만들고 사람들 눈이 많은 동헌 앞마당에 짐을 부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최풍원은 미향이를 통해 이현로가 지금 얼마나 다급한 형편에 빠져있는지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을 절대 내치지 못할 것이란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부러 사방에 까발리며 물건을 지고 청풍관아로 들어온 것이었다. 보통은, 보통이 아니라 약채를 쓰는 모두가 은밀하게 뒷거래를 했다. 서로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주고받은 거래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리 없었다. 먹은 놈은 먹은 게 있어 아무소리 못하고, 바친 놈은 바친 것이 아까워 그것을 벌충하느라 고을민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고을민들은 자신들이 못나고 빌려다 먹은 장리쌀을 못 갚아 당하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한탄했다. 그렇다고 최풍원이는 청풍부사 이현로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물건만 바치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최풍원은 이제껏 관례처럼 내려오던 약채 바치는 방법을 바꾸었지만 그보다 더 집요하고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부사 영감님, 여기 돈과 물건을 모두 치면 족히 이천 냥이 넘을 것이옵니다. 부사께서는 청풍관내 수장이시온데 용처가 어디 한두 군데이겠사옵니까. 그러니 부사께서 필요한 곳에 쓰셨으면 하고 가지고 온 것입니다요.”

누가 봐도 이현로를 매수하기 위한 약채인 것이 분명한데도 최풍원은 고을민들을 위해 내놓는 기부금인 것처럼 떠들었다.

“고을민들을 건사하는 일이라 나라에 임금이 계시고, 고을원인 내가 있는데, 일개 장사꾼인 네가 뭣 때문에 내놓는단 말이냐?”

“제가 아무리 돈만 밝히는 미천한 장사꾼이지만, 장사도 고을민이 없다면 누구한테 물건을 팔 것이며, 몽매한 고을민을 다독여 편히 살게 해주는 것은 부사 영감님 아니시옵니까. 그러니 결국은 부사 영감님이 계심으로 장사도 잘되고 우리 고을 모든 사람들이 잘 살고 있음이니 이것이 어찌 제 것이라 하겠사옵니까. 청풍 관내 모든 것은 부사 영감님 것 아니겠사오니까? 그러니 부사님 뜻대로 용처를 정해 쓰셨으면 하옵니다!”

최풍원이 자신이 가져온 물건이 제 것이 아니라 청풍부사인 이현로가 고을민을 잘 보살펴 얻은 것이니 부사 마음대로 해도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동헌 앞마당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그 어떤 사람도 최풍원의 말을 들으면 부사가 제 맘대로 써도 무방하는 말로 들렸다. 돈 주인이 제 돈을 내놓고 상대에게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시비를 걸 사람은 없었다.

“어허허! 내가 그 돈을 써도 될라나 모르겄네!”

이현로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헛웃음을 웃었다.

“부사 영감님, 혹여 따로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하명만 하시옵소서!”

최풍원이 한 술 더 떴다.

“그 사람 통이 큰 사람이구만!”

이현로가 몹시 흡족해했다.

“영감, 안으로 불러 치하 한마디 해주심이 어떠할런지?”

김개동이가 이현로 눈치를 살피며 헤헤거렸다.

“모두들 물러가라 하고, 최 행수만 들라하게!”

이현로가 동헌 집무실로 들어가며 김개동에게 명했다.

“이보게, 영감께서 들라하네! 어서 안으로 들게!”

김개동이가 봄바람에 이파리 흔들리듯 엉덩이를 요리조리 흔들며 마당까지 내려와 알분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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