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충청매일] 역사는 과거의 뼈아픈 상처를 비쳐보는 거울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창(窓)이라 한다. 101년 전 선조들의 3·1운동은 왜 일어나야 했을까? 겪어보지 못한 세대를 위해서라도 그 원인과 실상을 재조명하고 국민정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말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왕정(王政)을 강압과 위협으로 을사보호조약(1905년 11월 17일)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또 1910년 8월에는 친일파 이완용을 앞세워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을 맺는 국치(國恥)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일제는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개명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야욕을 품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일본은 한국인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누명을 씌워 무차별로 폭행하고 감금한 것이 18만명에 이르렀다. 헌병, 경찰, 교사까지도 칼을 차고 한국인을 때리기 위한 태형(笞刑)이란 벌칙을 정해 매질을 가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무단정치를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바꾸면서 관청의 서고와 개인 서재까지 뒤져 역사 지리 민족정신에 관계되는 책은 모조리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죄 없는 우리 백성이 왜 일본인에게 맞아야 했는가. 힘이 없어 나라를 강탈당한 국민의 설음이 어떠한지를 당시 우리 선조들은 뼈 절이게 느꼈을 것이다. 때마침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는 국제정세 속에 고종 황제가 서거하자 일본인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의문이 제기되어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드디어 18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연행 구금 되었다. 당일 낮 12시 탑골공원에서는 전국에서 상경한 수천명의 학생과 국민이 모여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3·1독립만세 운동은 4월까지 2개월간 1천214회. 전국 218개 시·군 중 211개 곳이 가담하는 거족적, 무저항적 독립운동이었다. 3·1독립만세 운동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인명피해는 사망자 7천500명, 부상자 1만6천명, 피체포 인원 4만7천명이다. 불에 타버린 민가 715호, 교회 47개소, 학교가 2개교였다

세계 1차 대전 후 국제질서는 제국주의적 양육강식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주의와 국제공동체의 새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3·1 운동을 기점으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도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번져갔다. 일제의 악랄한 탄압을 뚫고 삼천리 방방곡곡을 뒤엎은 자주독립의 외침은 자유민주주의 모태이며 씨앗이다. 통합 정의인 비폭력의 3·1정신은 과거 100년 우리민족을 살아있게 한 생명이요 향후 100년의 미래를 밝혀줄 등불이다. 오늘의 현실은 우리가 갈망했던 북한의 비핵화, 경제전망도 불투명하다.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온 나라기 큰 재난을 격고 있지만 3·1운동 101주년을 맞으며 우리들에게 시사(示唆)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동북아 4대 강국의 패권 경쟁 속에 약소민족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면 한미동맹을 가일층 강화하고 나라 지키는 힘을 길러야한다. 둘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치(旗幟)를 높이 들고 온 국민이 뭉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와 이념갈등에서 헌법적 가치의 정통성을 굳건히 지켜가야 한다. 셋째, 일본은 사과 한마디 할 줄도 모르는 오만한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친일은 항상 경계 하면서 건전한 동반자로 미래를 열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3·1운동, 우리 선조들의 비장한 독립선언문 첫 구절을 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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