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군의회 베트남·캄보디아 해외 연수

   
 
  ▲ 베트남 하노이시 노이바이 농장을 방문해 향료재료로 쓰이는 농작물 재배 방법을 둘러보고 있다.  
 

음성군의회(안병일(맹동면), 이한철(음성읍), 윤병승(금왕읍), 박희남(대소면), 이준구(생극면), 정지태(감곡면), 강연수(삼성면)의원이 지난 9일부터 14일까지 5박6일 일정으로 전쟁과 내전의 피해국인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1번 국도를 타고 하노이시에 접어들자 자전거, 오토바이 행렬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눈에 들어왔다.

물소가 논을 갈고 농사짓는 아낙의 모습과 한 떼의 물오리가 수로를 빠져 나오자 농부가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뒤쫓는 모습은 남방 특유의 고유한 풍경이다.

하노이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수도로 정치, 문화의 중심지다.

베트남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됐으나 현재는 전쟁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 복구가 돼 깨끗하고 아름다운 가로수가 거리를 풍요롭게 한다.

11세기에 세워진 이래 1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답게 주변에는 사찰이 많고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콜로니얼 스타일의 교회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다.

자동차에 비해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많은 거리는 활기를 띠고 전통 복장인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들이 거리를 더욱 생기 있게 만든다.

사람들은 모두 소박한 소시민들이고 매우 친절하며 의외로 한국인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현재 최대의 투자국으로 한국이 부상했기 때문에 도리어 자기들을 돕는 동반자로서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하노이는 전통적이고 소박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접할 수 있는 좋은 지역임에 틀림없다.

1969년 9월2일 사망한 베트남 민족의 영웅인 호치민 묘는 넓은 광장에 대리석 열주로 만들어져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케 하고 있다.

목조 건물엔 그가 사용하던 집기가 보존돼 있고 평소 소박한 생활의 면모를 감명 깊게 구경 할 수 있다.

영화 ‘인도차이나’의 무대인 하롱베이 호수는 잔잔한 바다에 점점이 흩어진 2천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형성돼 있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서정적으로 그려졌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인 하롱베이는 ‘평화’ 그 자체였다.

베트남전의 환란 속에서도 이곳은 전쟁의 포화가 닿지 않았다고 한다.

▶캄보디아

캄보디아의 씨엠립 국제공항은 내려꽂히는 땡볕과 드넓은 벌판 속에 초라하게 서 있었다.

속살을 드러낸 맨땅,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는 낮은 건물과 비포장 도로들이 우리나라의 50년도를 연상케 한다.

1인당 GNP 500달러와 문맹률 60%라는 지표가 알려주 듯 저개발국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눈앞에 펼쳐진 앙코르 유적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녹이 슨 듯 푸른색이 감도는 거대한 돌과 벽들은 천년 세월의 흔적을 강렬한 흑백톤으로 품고있었다.

앙코르제국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 중반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밀림의 거대한 나무뿌리들로 유적들이 온통 뒤덮인 채 고대의 사원을 집어삼키며 무너트리고 있었다.

자연과 공존하는 문명의 모습이 이처럼 무섭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동양최대의 호수인 톤레삼 호수를 보기 위해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톤레삼 호수에서 사는 사람들은 캄보디아 안에서도 제일 못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호수를 둘러싼 마을에 도착하자 야자 잎으로 만든 집들이 쓰레기 더미와 함께 눈에 들어왔다.

아니나다를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거지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원 달러”를 외쳤다.

관광객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다.

가이드가 절대로 그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는 캄보디아 성인이 하루종일 힘든 노동을 하면서 버는 돈이 1달러인데 구걸하는 어린애들은 하루에 6∼7달러를 번다는 것이다.

그 돈맛을 아는 어린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힘든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지난 90년 끝난 폴포트의 3년 7개월 집권으로 인해 생긴 현실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의 삶은 마치 우리의 50년대와 비슷하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은 더없이 맑았다.

하지만 그 맑은 눈 속에 비춰지는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수상가옥의 집들은 배처럼 지어서 여기저기 옮겨다닐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호수의 물 또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이 됐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도 하고 있다.

전쟁의 후유증은 너무나 크게 보였다.

지금은 많이 안정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도 개방했고 외화벌이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등 빠른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킬링필드 희생자들의 해골과 유골들을 모아둔 위령탑은 소박했다.

숱한 비극을 거치면서 회복하기 힘들만큼 처참하게 파괴된 캄보디아의 현실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자존심 강한 베트남, 캄보디아 사람들.

그들에게 ‘인도차이나’라는 말은 치욕이다.

그것은 좌우 대립과 전쟁을 겪으며 가난에 신음했던 우리의 과거였던 것이다.

우리보다 열악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음성군의회 의원들의 이번 해외연수는 군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제공하기 위한 하나의 원동력이 됐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