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청주예총 부회장

[충청매일] 영원한 눈(雪)의 안식처'로 불리는 히말라야 중앙부에 자리한 네팔에는 에베레스트(8천848m)를 포함하여 8천m급 고봉들이 8개나 즐비하여 순수와 신비의 광채가 빛나고 있다. 수도 카투만두에서 2키로 떨어진 언덕 위로 300계단을 헐떡이며 올라서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된 ‘스와얌부나트’ 사찰이 있다. 일명 ‘원숭이 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상’의 양 눈 사이에 눈이 하나 더 조상(造像)되어 있어서, “아이고 이상해라, 부처님 눈이 세 개네!”라며 의아해하기도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만나며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인생은 만남’이라고 한다. 사람에겐 눈이 두 개가 있다. 두 눈으로 보니까 상대방은 정확하게 보인다. 상대방의 잘잘못은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다.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굉장한 상처를 받는다. 밝은 면을 보는 게 아니라 어두운 면을 보고 낱낱이 지적하다보니 상호간 다툼과 갈등을 야기한다. 요즘 정치판을 보자! 상대편의 사소한 말실수도 용납 못한다. 뼛속까지도 속속들이 후비고 판다.

왜 그런가? ‘마음의 눈’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안(心眼)’ 즉 ‘지혜의 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행이란 결국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네팔의 불상에서 보는 ‘제3의 눈’이요, 지혜의 눈이다. 수행이 부족하여 마음 공부가 부족한 사람은 남만 쳐다보게 되어, 남의 잘못만 따지게 된다. 결국에는 상처를 주고 원한을 맺게 되어 원수가 된다. 명심보감에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려면 모름지기 자기를 먼저 돌아보라(욕량타인(欲量他人)인데 선수자량(先須自量)하라)”라는 말이 있다. 세상사 모든 게 입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지혜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정확히 보는 통찰력을 말한다.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보는 능력, 현상이 아닌 본질을 보는 능력을 말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지식을 배워서, 지식을 넘어서,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지식과 지혜’를 혼동한다. 지식은 분별능력- 이것과 저것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 을 키우는 것이다. 지식은 칼로 비유된다. 칼을 잘 쓰면 이롭게 되고, 자칫하면 사람을 해하는 살생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 대립과 경쟁과 투쟁이 만연한 것도 지식 위주의 가치관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위주의 교육을 비판하고 ‘지혜’를 강조한다. 지식을 ‘분별지(分別智)’요, 지혜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할 수 있다. ‘너와 나’를 대립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분별지’라면, ‘너와 나’를 하나로 연결된 ‘무분별’로 보는 것이 지혜이다. 그래서 지혜는 ‘지식+자비와 사랑’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지혜는 대립과 경쟁을 넘어 조화와 상생과 화합을 지향한다. 지혜에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마음의 눈이 깃들어 있다. 지식이 팽배하면 비교하는 마음이 싹트고, 비교하면 ‘교만심과 열등심’이 돋게 되어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외형적인 현상을 분별(分別)하는 것이 ‘지식의 눈’이라면, 마음의 눈(心眼)이 본질을 보는 꿰뚫어 보는 것이 ‘지혜의 눈’ 혹은 ‘제3의 눈’이다.

3월이 되면 새 학년이 시작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지혜의 눈’을 물려주자! ‘너와 나’를 대립하는 ‘분별지(分別智)’를 넘어, ‘너와나’를 하나로 이어주는 공감과 배려와 사랑과 자비의 심성을 길러주자! 이것이 ‘무분별지(無分別智)’요, ‘제3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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